화장실에 가기 위해 방을 나서니 아빠가 거실에서 술을 드시고 계셨다.
나는 또다시 불안해졌다.
(이 집에는 나와 아빠 단둘만 있고, 아빠는 술을 마시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후 아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또다시 시작이다.
이번에도 여전히 아빠는 빙글 빙글 말을 돌렸고, 나는 꼬박 꼬박 대답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란다.
이제 군대 가기 두달 밖에 안남았으니 그만 두란다.
군대 가면 고생할텐데,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일하는게 부모 입장에서는 마음이 좋지 않단다.
(그러면서 나를 당신 옆에 세워두고 일을 시켰단 말입니까?)
군대 가기 전까지는 용돈이나 받으면서 그냥 놀란다.
(그러면서 저한테 돈을 빌려가시나요?)
"네 엄마한테 달라고 하면 줄거야. 네 엄마니까."
역시나 자신이 준다는 얘기는 아니였다.
엄마가 내게 돈을.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내 의견을 말했다.
두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놀러다닐 일도 없으며, 엄마가 용돈을 준다는 보장도 없으며,
하루 종일 일하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만 일하는 거니 노는데 지장은 전혀 없다.
한달도 일하지 않고 그만 둔다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일 하겠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아빠가 결정한 일이고, 그렇기에 내가 뭐라하든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았다.
다음 문제.
나보고 아직도 어린애란다.
자식이면,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다리 역활을 해줘야 되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며 어린애란다.
아빠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이혼은 결코 내가 결정한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들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는 것을.
다리 역활은 못하는 것처럼 보여도, 중간에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낀 것만으로도 매우 피곤하다는 것을.
양쪽의 서로에 대한 요구와 불만을 '대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지쳤다는 것을.
자기들 멋대로 결정한 일을 내게 떠넘기려 하고 있다는 것을.
내게는 일체의 의견도 구한바 없이 갈라섰으면서,
이제는 자신들의 의견을 서로에게 전해줄 것 까지 강요한다.
그렇게 한참을 듣기만 하다가, 내가 한마디 했다.
"그나저나, 술 좀 줄이세요. 중풍 기운이 있네, 어쩌네, 하면서 그렇게 술을 드시면 어쩌라구요.
아빠와 대화를 하는 것은 좋지만, 다음부터는 술을 안드신 상태로 대화했으면 좋겠어요.
그거 알아요? 여태껏 아빠와 10분 넘게 대화한 적은 모두 아빠가 술을 드셨을 때 뿐이라는 거.
친척들이나, 아빠 주위 사람들을 만나면 다들 내게 그래요.
"아들인 네가 아빠보고 술 좀 줄이라고 해라" 이렇게 말한다구요."
그러자 말한다.
"나는 적어도, 술 사오라며 너를 때린 적은 없잖아. 자식들 버리고 도망간 일도 없고 말이야..."
참으로 고맙습니다.
술병을 휘두르지 않아줘서. 버리지 않아줘서.
군대, 두달이나 남았다.
오늘 하루도 그냥 넘어가질 않는군요.
담요2004-02-12 14:44조회 403추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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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psyche2004-02-13 07:54
제 자신이 부끄러워요
Keeping the oxygen2004-02-13 19:18
어쩌면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아버지는 어떠어떠 해야한다는 '아버지'의 이미지 때문에 기대를 품고 사는지도 모르지요. (말로는 이젠 기대 안 한다라면서 욕을하는 등 온갖 비난으로 매도를 하는 그런 경우, 그러한 행위는 아직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는 말이 됩니다.)
버리세요. 그런건 버리고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리고 몇번 시도해보셨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요구사항같은걸 모두 들어드리는라는등 그런 말은 아닙니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마음만은 한결 편해지시리라 믿습니다.
버리세요. 그런건 버리고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리고 몇번 시도해보셨겠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요구사항같은걸 모두 들어드리는라는등 그런 말은 아닙니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마음만은 한결 편해지시리라 믿습니다.
뭐 물론 글만읽고 내상황과 비슷하다~ 라 말하는건 섣부른 지레짐작일테지만,
제게있어 아버지라는 사람은..
겨우 끼니를 이어나갈만큼의 돈을 가정에 제공한 사람이자, 엄마께 정자를 제공한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랍니다.
폭력도 아주가끔사용할뿐이고, 밖에 또다른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 버리진 않았죠,
본인 나름대로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게,
늘 "넌 아직 멀었다. 어린애야. 인생이란 말야~ 인간이란~ 삶이랑~블라블라블라~"
말로만 떠드는거,
말로만 해대고 행동은 정반대로 모순적인거,
그걸 지적하는 상대는 죄다 폭력으로 입다물게 만들고, 후후
한가지 다행인것은..
아버지란 사람이 아무리 아버지같지않고 심지어 사람같지 않아보여도,
제 어머니라는 분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거든요.
부모에게서 사랑받는게 어떤건지, 가정이라는게 뭔지, 사람과 사람사이의 정이라는것과 도리라는게 뭔지,
몸소 늘 제게 보여주시는 분이라서,
엄마가 아빠역할, 엄마역할 다 해주고 계시니,
아빠라는 인간이 내 철부지 동생역할을 하며 살고있더라도,
뭐 어떠냐,
일종의 체념처럼 살고있어요. 더이상 그사람에게 기대하는건 어리석은일일테니까.
어느가정이나 자신들만의 문제를 가지고 속끓이며 살고있겠지만.
때론 사람이 할짓이 아니다 싶을만큼의 문제들이 생기는걸 보면.
가정은 남들이 다 꾸린다고해서 아무나 다 꾸려도 되는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에잇=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