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서 장학금 신청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앞에 있는 공원에 들렀다. 정문 안쪽에 크게 써있는 '보라매' 간판 앞 벤치에서 아까 뽑아 낸 콜라 한캔과 구멍가게에서 사낸 감자칩을 들고 앉았다.
그리고 몇 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
사람들은 움직였다.
숏패션차림의 커플들이 이어폰을 나눠끼고 걷고있었다. 고동색 지팡이를 그러쥔 백발할아버진 다섯발자국 걷다가 쉬고 다섯발자국 걷다가 쉬고를 반복했고, 할머니 두분이 그 뒤를 좇다가 쉬다가 좇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잠시후엔 꼬마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꺄르르 거리며 정신없이 내 눈을 휘젓는가싶더니, 곧 내또래의 남자들이 인라인으로 또 한번 내 머릿속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리고 내 이마 밑으로 노을빛이 물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미적지근해진 콜라 주둥이를 땄다. 김이 올라오질 않는다. 내 눈에도 무언가의 흥분없는 무초점의 시선이 계속된다. '돌아갈까' 하고 생각해본다. 뭔가 할게 있어서 여기 온 건 아니었다. 단지 나무가 보고싶고, 사람들이 보고싶고, 바람을 마시고 싶고, 유월의 햇빛을 맞고 싶고, 설마 비가 내리면 비도 맞고 싶고, 어쩌다가 동네 친구를 만나면 인사도 해보고싶고 그랬다.
그랬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뜨거워진 엉덩이를 탁탁 털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김빠진 콜라와 뜯지도 않은 감자칩을 양손에 든채로. 아까 왔던 길을 발자국 하나 틀리지 않고 고대로 쫓아갔다. 자동차가 윙윙거리는 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진다. 육교위의 고등학생들이 아래로 침을 탁탁 뱉었다. 떡파는 아줌마는 커다란 스텐대야를 머리에 올리기 시작했고, 헬륨풍선을 떠나보내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나는 아직도 김빠진 콜라와 감자칩을 물에 젖은 실내화를 들 듯, 애매하게 집은 채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다른 사람 눈엔 내가 어떻게 비칠까?
'우중충한 하늘 아래 떡파는 아줌마가 대야를 머리에 이고있고, 옆엔 이상한 아저씨가 어디서 훔쳤는지 감자칩과 빈콜라캔을 양손에 들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걷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자 난 킥킥대며 웃었다.
'.....감자칩과 빈콜라캔을 양손에 들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걷다가 갑자기 킥킥거린다 미친X이 분명하다'
조금만 참으세요
귓속에 뭔가 길쭉한 것을 집어넣고 차가운 액체를 뿌려대는 의사는 날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조금만 참자. 내 살을 파고드는 빌어먹을 염증도, 불쾌하기 짝이 없이 평범하게만 흘러가는 시간도, 아직 빛이 돌아오지 않는 앞길도. 몇 년이 걸리더라도 참아보자.
네. 이제 다 됐습니다. 일어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