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글 보기

TV

캐서린2004-06-25 14:01조회 342추천 12

우리집은 정확히 93년 12월까지 금성에서 제조한 80년대 구식 로터리 티비를 썼다.
몇 인치인지 재보진 않았지만,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들이댈 때마다 가끔씩 그 생각이 나는걸 보면,
얼만진 몰라도 엄청 작긴 작았나보다, 뭐, 하여튼,
우리가족은 그렇게 작은 티비화면에 머리를 맞댄 채로
10여년 가까이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깔깔대거나 웃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했었다.
그 구식, 금성, 로터리 티비는 안테나와 자주 다퉜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자기 얼굴에 무작위로 줄을 그어댔고,
거기서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시끄럽게 앵앵거리기 시작했다.

"나,오,니이!"

아버진 잠옷차림으로 옥상에 올라가서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그가 궂은 바람에 탈모증세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안테나의 모가지를 붙들어 흔들때마다
티비는 뭐가 아직 그리 심통인지 지지직,그렇습니다,지지직,그렇게 깊은뜻이,치익, 하고
낼름낼름 혀를 내밀면서 당신의 얼굴을 검사하고 있는 날 놀려대었었다.
그럼 난 티비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세게 친 다음, 밖으로 달려나가서,

"아뇨!"

하고 외쳤다.
그렇게 4,5번을 오가면 으레,
티비는 평정을 되찾고 화면에서 나타나듯,
거칠게 심호흡을 몇번 한뒤, 청명한 예전의 모습을 다시 내비치곤했다.

"야 뉴스 틀어봐."

그럼 아버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의 이순신 장군처럼,
자신의 사명을 다한 포근한 표정을 지으며 쇼파에 널부러진 채로,
말그대로 널부러진 채로 경제가 어떻고, 어디에 화재가 났고 하는 티비의 이야기를
무표정으로 듣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초라하던 것,
그렇게 우릴 애먹이던 애물단지가
지금은 좀 더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꼬리엔 정체모를 영상장치랑 게임기를 등에 업은 채,
전보다 듬직해진 어깨를 벌리고선 거실 한복판을 떡하니 차지하고
예전에 아버지의 그것처럼 무표정으로 널부러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슬프다.
내 가슴에는 10여년 전의 그 우스꽝스러움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따뜻함도 잃은 것 같다.
딱딱거리며 채널을 돌리던 손맛도,
안테나를 부여잡고 마이크삼아 노래 부를때의 음정도,
치익거리며 흰줄검은줄을 남발을때 저려오던 두통도,
어쨌거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
이 글의 주인이신가요?

댓글 7

끙끙2004-06-25 14:37
어디서많이 본글 전개방식 ...
아침2004-06-26 00:59
웁 그렇게 우스운 내용 같지 않은데 왜 이리 읽는 내내 웃기지;;
나무2004-06-26 01:08
나,오,니이 ㅎㅎ
Meditation2004-06-26 02:21
음 저희도 그런 TV를 썼드랬죠 ^^
나이트초퍼2004-06-26 03:05
방망이 깎던 노인이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요..
생강빵과자2004-06-26 03:43
저희집도 초등학교때 그것때문에 지붕위에 올라가곤 했어요
김세영2004-06-26 07:59
와하... 신기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