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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춘은 청춘보다 위대하다.

담요2006-04-27 03:07조회 366추천 6
오전에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하나가 들어왔다.

"음, 여기서 혼자 비디오 보고 그럴 수 있는 거야?"

어서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상대가 백발의 할아버지임을 확인하고는-
동냥을 하러 온 거다, 싶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심하게 빗나갔다.

"에로 영화는 어디 있어?"

"에, 에로... 에로는 이 쪽이예요."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공손히 알려드렸다.

"음, 여기 있었구만. 얼마야?"

"혼자 보실 거면 6,000원 이예요."

이번에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다시 한번 공손히 일러주었고,
이내 뭐가 그리 비싸냐며 나가시리라 생각했다.

"아, 글쎄 얼마냐니까?"

"6,000원 이요!"

이제 보니 귀도 살짝 어두우신 거 같다.
할아버지가 천천히 몸을 낮춰 쭈그려 앉으셨다.
그리고는 표지를 찬찬히 흝어 보신다.

"네가 재밌는 걸로 하나 추천해 줘 봐."

"에,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안봐서 잘 몰라요."

"그럼 내가 도무지 뭐가 뭔지 알 턱이 있나?!"

말씀은 그렇게 하시고선 곧장 내게 테잎 하나를 건낸다.
케이스의 표지에는 <여비서 벗기기>라고 적혀 있다.
정말 보시려는 건가, 하고 경악하고 있는 내 손에는 어느새 만원짜리 한 장이 놓여 있다.
거스름돈 4,000원을 거슬러 드리고, 방으로 안내를 하고,
비디오를 틀어드렸다.
중간 중간에 카운터에 있는 TV로 화면을 확인해 봤는데,
제목이 내용의 전부인 영화였다.
말 그대로 여비서 벗기기.
영화는 1시간 30분 짜리였는데, 할아버지는 1시간 정도 후에 그냥 나가셨다.
잘 봤다, 라는 말을 남긴 채.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만끽하며 방을 치우러 들어갔다.
방은 깔끔했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하지만, 대체 이건 무엇인가.
방문을 열자마자 진동하는 30년은 더 말린 것 같은 오징어 냄새와
휴지통의 화장지 뭉치 두 개.
묻고 싶어졌다.
손주도 할아버지의 일과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해내실 생각인지.

언젠가 늙어 죽게 되면 꼭 마누라랑 같이 죽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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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김상태2006-04-27 05:55
연세가 어느정도 되시는건가요? 전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길거리의 할아버지들은 젊은여자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가......두렵기도 했고.
muse2006-04-27 10:51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똑같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요.(아, 남성비하는 아닙니다.
저도 남자걸랑요)-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