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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isla bonita

Rayna2007-02-25 18:23조회 593추천 13

청량리TMO의 황당스런 행정처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엊그제 이맘때쯤 강릉행 차에 몸을 뉘인 채로 doves의 m62 song을 듣고 있었을텐데. 모처럼 큰맘 먹고 품어봤던 로망(?)이 갓 만들어낸 딸기 쉐이크를 따라 목구멍을 타고 무참히 삼켜졌다. 그래요, 사고 안 치고 멀쩡히 잘 살던 사람도 얼룩무늬 각모만 썼다 하면 '센스'를 비롯한 체내의 모든 능력치들이 반감기를 맞이한다는 거. 본인도 몸소 체득해온 바 있으니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저씨, 너무하잖아요. 세상에 밤 10시에 출발해서 오전 4시 반에 다시 상행선을 타는 동해바다 나들이가 어디 있나요.

*  *  *

생각해보면 이 집 사람들은 "여가는 돈과 재력에 정비례한다"는 세간의 편견에 맞서기라도 하듯 제각기 다른 '도피행각'의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회사가 채권단들 손에 갈기갈기 찢겨질 무렵 아빠는 MTB로 서울 바닥에 널린 온 산들을 신들린 듯 오르내렸고, 엄마는 한 달에 두어 번 나올까 말까한 쉬는 날을 모으고 모아 외할머니와 함께 강원도 산골을 헤집고 다녔다. 그 사이 동생녀석은 여기저기서 모아 온 용돈을 긁어 24시간 IRC와 온라인게임을 돌리는, 가장 정적이고 힘 안드는 방식을 택했다. 덕택에 나는 집안에서 돈도 제대로 못 벌면서 제일 값비싸고 피곤한 방식으로 놀러다닌다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그런 탓에, 작년 봄에 두 차례 비진도를 다녀오면서 있는 내내 황홀경에 젖어있다가도 그런 감상들을 햇살 드는 카페에 들러 스타벅스 커피를 소비하는 정서와 다를게 뭐냐는 식으로 묶어 자책했던 적이 있었다. 허나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을 품어본 지도 제법 되었다 싶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하루 일당 2400원으로 10시간 작업에 추가 야근을 요구당하는 현실을 밀쳐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부조리는 부조리라 언성을 높일 힘마저 잃을 수는 없다고 아둥바둥 악을 쓰고 다닌다. 파랑새를 꿈꾸며 공상에 부풀어있을 시기는 이미 지났건만, 그나마 그만한 '도피행각'마저 없이 남은 일상들을 어떻게 버텨낼까 하며 이 악물고 하루 해를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더 간절한 지도 모르겠다. 배 타고 물을 건너 백사장 앞뒤로 파도가 감싸고 있는 그곳에 닿았을 때의 환희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그런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을텐데. 예전처럼 겨울 바람 가시지 않은 해변가에 혼자 파라솔 펴고 누워 음악을 틀어댈 무모함은 없어도, 곁에서 결국엔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지 않겠냐며 자조하듯 울상을 지어보이는 사람이 있거든 조용히 이어폰 한 쪽을 건네줄 용기는 있다. 아직까지 그래본 일이 없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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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철천야차2007-02-25 23:00
쪽지 확인했는감? 연락을~
포르말린2007-02-26 02:04
비진도 정말 좋아, 그치?
Rayna2007-02-26 02:24
야차/ 있다 뵈어요.
말린/ 소매물도도 좋고, 연화도도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치만 전 역시 비진도가 제일. 몇 번이고 다시 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곳 같아요.
2007-02-26 06:27
어제 만난 사람들이 너와 인사를 제대로 못 나눈걸 아쉬워 하더군
다음 기회가 당연히 있겠지^^

멋진 레이나, 잘 버텨줘.
스캇2007-03-08 11:09
T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