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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 그리고 그 시절

elec2007-03-23 11:03조회 770추천 18


작년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기간동안 알에치에 몇 번 정도 글을 남긴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그랬듯이 난 빙그레 시절부터 골수 이글스 팬으로 지내왔다.

내가 처음 이글스 팬이 된 건 1990년도인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그 때쯤 이글스는 강팀이었고, 페넌트레이스에서 항상 좋은 성적을 내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해왔다. 88년엔 정규시즌 2위, 89년엔 1위, 90년엔 4위, 91년엔 2위. 90년도에는 아쉽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세 번의 시즌에는 강력한 전력을 과시하며 최종전까지 진출했었다.

하지만 그 세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이글스는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의 말을 빌자면, '이글스는 최강이었지만 아직 미숙했다. 터질 때는 끝도 없이 터져 천하를 삼킬 듯 했지만 급소를 찔려 한 호흡 밀리면 순식간에 주저앉고 마는 풋내기였다.' 그 세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연거푸 만난 해태 타이거즈와 선동열(그리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펄펄 날아다녔던 김정수)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글스도 나도 계속해서 좌절해야만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가장 큰 소원이, 한국시리즈에서 이글스가 해태를 이겨 우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92년이 되었고, 이글스는 어김없이 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해 이글스는 역대 최강이었다. 이글스는 81승이라는, 2위와 승차가 열 경기가 넘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하면서 일찌감치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확보해 놓았었다. 장종훈은 그 해 당시로서는 역대 최다인 41개의 홈런을 치며 홈런왕에 올랐고, 이정훈은 0.360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송진우는 19승과 17세이브로 다승왕과 구원왕 타이틀을 독차지했으며, 10승을 넘은 투수는 네 명이나 되었다. 그에 비해 해태는 3위와 반게임 차이로 겨우 2위를 하였으며, 선동열은 부상으로 나가떨어졌다. 소원을 푸는 시점이 생각보다 빨리 온 것 같았다.

그렇게 포스트시즌은 시작되었다.

롯데는 삼성을 2승으로 가볍게 제압하고 플레이오프로 올라오더니, 플레이오프에서는 5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그 해 준플레이오프 때부터 21이닝을 던지는 동안 한 점도 내주지 않은 염종석의 무시무시한 투구로 해태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다. 나는 해태가 올라오지 못하게 되자 아쉬운 한편으로는, 꼴찌 이미지가 강했던 롯데를 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4수 끝에 드디어 한국시리즈를 먹는구나.








그 해 롯데는 이글스를 4승 1패로 꺾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MVP는 2승 1세이브의 기록을 거둔 박동희가 뽑혔다.





그 해 나의 충격은 상당해서, 시리즈가 허무하게 끝을 맺는 순간 이건 말도 안된다며 눈물을 흘렸으며,(결국 부모님께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이글스의 성적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자 그건 순전히 92년도의 충격 때문임을 강변하고 다녔다.(주위에 이글스 팬인 친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귀담아 듣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친구들은 오로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광분할 뿐이었다.)

또한, 나는 그 때부터 박동희를 가장 두려운 투수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 시리즈에서 박동희가 보여준 투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우선 그의 투구패턴은 투박했다. 직구와 커브 두가지밖에 던지지 않았고, 그 중에 직구는 정말 무지막지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했다. 내 생각에 직구만으로 보면 그는 선동열 이상이었다. 이글스 타자들은 그 공에 엄두도 못내고 스러져갔으며, 결국 역대최강이라던 그 해의 이글스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끝장이 나버렸다.

그 이후에도 내 기억에는 박동희가 굉장한 투수로 남아있었다. 그가 등판하는 중계를 볼 때마다 92년의 그 안타까움이 생각나 치를 떨었으며, 공교롭게도 내가 볼 때마다 그의 투구내용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고 예의 그 직구도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그가 삼성유니폼을 입고 나와 어느 팀인가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는 장면을 아직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본 모습만으로는 그는 연평균 10승에, 삼진을 한 150개씩은 잡아주는 투수였고, 그렇게 따지면 통산 100승쯤은 거두었어야했다. 하지만 통산성적은 59승 50패 58세이브 평균자책점 3.68.

사실로 말하자면 그는 92년부터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불안한 제구력으로 간간이 나오던 폭투는 '직구와 커브에 이은 제 3의 구질'이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었으며(공이 손에서 빠지지 않아 땅바닥으로 공을 던진 일, 3루 덕아웃쪽으로 공을 던져 타자와 심판을 벙찌게 만들었던 일 등은 전설처럼 전해져온다.), 주자가 나가면 달라지는 투구내용은 사람들이 그를 새가슴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또 롯데시절부터 이어진 무리한 연투로 인한 혹사는 부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롯데를 떠나 삼성으로 이적한 후 소리소문없이 옷을 벗었다.





어제 새벽에 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통해 그의 시신이 소방대원들에 의해 실려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울컥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은퇴하고 나서도 비운의 투수로 곧잘 회자되곤 했다. 아마시절에 그는 최강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전국대회 평균자책점 0이라는 무시무시한 전설을 남겼고, 고려대 시절에는 국가대표 에이스로 88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하였던 그였지만, 프로에서는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은퇴 후에도 그는 야구인으로 언제까지 남고 싶었으나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야구와 떨어진 삶을 사는 와중에서도 야구를 잊지 못해 사회인야구팀에서 활동하고, 일반인들이 야구를 하기가 힘든 척박한 저변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사회인 야구장 건설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 야구장의 건설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떠나고 만 것이다.

그는 나에게 있어 두가지 이미지로 남아왔다. 하나는 기록으로 남은 그의 초라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와일드한 투구폼으로 절대 칠 수 없을 것 같은 묵직한 직구를 뿌려대던 특급투수로서의 이미지이다. 두가지 모두, 나의 어렸을 적 열광하던 야구의 추억, 이제는 너무 무디어진 한국프로야구의 찬란했던 기억에 대한 진한 향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함께, 그 추억을 말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던 그의 허망한 죽음과 함께, 그 시절은 다시 한 걸음 멀어져 갔다. 그의 죽음이 한때 화려했고 그토록 내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프로야구의 끝인 것만 같아서 갑자기 슬퍼졌다.


때마침, 목하 프로야구는 위기에 처했다. 그 시절의 스타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있다. 나는 언제까지 야구팬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일지.


박동희 선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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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멍멍멍2007-03-24 13:50
그래요...
명복을 빕니다.
박동희 선수, 롯데팬이신 우리 아버지가 상당히 좋아하는 투수였는데...
안타깝네요
닉이라는이름은없다2007-03-24 14:40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야구에 좀일찍 관심을 가질걸 그랬네요
옛날이 더 재미있었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