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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속 황산 안개

캐서린2007-06-24 09:46조회 587추천 10
어릴적에:

그러니까 팽이에 미쳤던 시절이다. 퇴근길 아버지가 사다주신 쇠팽이로
깡통슈퍼앞 골목의 무림을 제패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나는 송충이를 좋아했고 아메바의 이분법을 동경했다.
잠자리의 배를 뒤집어 입에 물리길 취미삼았으며,
넘어져서 피가 나면 소나무 잎을 빻아서 상처난데 약발랐고,
눈내리면 운동장에 누워서 예의 빨간 입을 벌려 눈송이를 아그작거렸다.
  
아그작거리는데: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일란성 쌍둥이에, 똑같이 버섯머리였다.
웃으면서 내 눈을 쳐다보는데 눈이 자꾸 눈썹에 닿아 녹아흘러서
난 그녀를 잘 볼 수가 없었다. 웃었다. 문장 그대로 웃기만 했다.
나는 부끄러워져서, 얼른 손을 땅에 짚어 윗몸을 일으켰다.
쌍둥이가 한발짝 물러섰다. 나는 침을 퉤퉤뱉었다.
쌍둥이는 더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게 그랬다. 첫만남이었다.

첫만남에서: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땅에 닿지 않는 발을 굴렀다.
그녀들은 나와 동갑이거나 한살 높았다.
동그라미 딱지, 똑같은 캐릭터의 그림이지만 별의 갯수는 다른, 처럼
그녀의 모습은 같았지만 왠지 분위기에서 풍기는 계급의 차이가 있었다.
쌍둥이들은 엄마가 없다고 했다.
아빠가 돌나르는 일을 하는데 어제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엄마 찾으러 간 거 아니야?"

호빵 사먹자:

언니는 우리 호빵 사먹자, 라고 동생에게 말했지만
나에게 애둘러서 말하기 위한 수법이라고, 당시 순진했던 나였지만
왠지 드라마나 영화의 원리를 배경 삼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오백원짜리 동전을 하나 꺼냈다.
언니는 나도 돈 있어, 그럼 두개씩 사먹을래? 라고 말했다.
동생이 고개를 크고 빠르게 끄덕였다.

컨테이너 우리집:

호빵을 사서 거기에 이빨을 드리우려는데
언니가 "우리집에 가지 않을래?" 했다.
나는 당황했다. 빠른전개에 놀란 탓이었다.
호빵과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언니에게 끌려가다시피 한 곳은
동네 외곽에 있는 컨테이너집이었다. 주변엔 샛강둑이 있었고,
그 끝자락에 빗물펌프장이 웅웅소리와 이따금 쿵쾅 소리를 내며 펌프를 돌렸다.

숨바꼭질:

각자 하나씩의 호빵을 쿨피스와 함께 먹어치운뒤,
우린 거나해진 배를 쓸어내리며 집에 널려있는
소주병이며 이불가지를 잘 정돈해 치웠다.
난생처음 나에게 관심보여준 쌍둥이의 언니에게 잘보이기 위해
나는 그들보다 좀더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야만 했다.
뺨위로 땀방울이 하나둘씩 맺히려는데 동생이 소리쳤다.
"우리 숨바꼭질하자!"

장롱:

그리하여 시작된 숨바꼭질에 술래는 언니였다.
언니는 간이옷장의 옆면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여섯일곱이 똑같은 템포로 넘어가더니 그 이후부터는 점점 빨라졌다.
동생은 창밖의 베란다 비슷한 곳에 숨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넷까지 어디 숨을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까치발로 주변만 어슬렁거리다가
방의 칸막이 반대편에 육중하게 놓여있는 나무장롱이 보였다.
나는 뛰다시피 걸어가서 장롱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이 내 머리 위까지 차지하고 있어서 나는 여러겹의 이불을
암벽등반하듯 올라가 빈공간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술래의 움직임을 주시하기 위해 문을 살짝 열어놓았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곧 술래가 움직였다.

술래는 농장안에 풀어놓은 야생마처럼
크게 소리내며 방을 이리저리 휘돌았다.

따르릉:

하고 전화가 울렸다. 술래는 전화소리에 놀랐는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전화기에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공교롭게도 장롱 앞이라서,
나는 쉬던 숨을 꽉 깨물어 참았다. 긴장한 탓인지 방귀를 뀌었다.

"네, 우리아빠 맞아요. 왜 그러세요?"

수화기 건너편의 목소리는 말이 끝났는지 계속되는지 모르게 조용했다.
언니는 상대방의 말에 계속 네, 네, 네 했다.

황산안개:

상대방의 목소리가 끝이 나고 언니가 말할차례가 되었다.
어쩐일인지 그녀가 말이 없다. 수화기를 잡고 아까처럼 고개만 떨구고 있다.
버섯모양의 머리가 얼굴앞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눈가는 어두웠다.

장롱 속의 구린내는 옛날 북유럽신화에서 본 발할이라는 신전처럼,
장렬히 전사한 영웅의 영혼이 되어 내부를 뛰돌아다녔다. 황산안개였다.
코를 움찔거려보지만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어쩌면 밖으로 퍼질수도 있었다.
누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문을 닫을까도 생각했지만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나는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언니가 울고 있었다.

흑흑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그 흐느낌은 잿빛안개가 되어 장롱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황산안개를 뒤집듯 감싸안았다. 나까지 동화되는듯했다.
나는 안개들의 싸움과 언니의 흐느낌과 수화기의 뚜뚜소리에 불편함을 느꼈다.

미안해요:

언니는 계속 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이 내려와 바닥에 뚝뚝거렸다.
북유럽의 창조신화처럼,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거인과 암소로라도 변할 것처럼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불쌍해졌다.
왠지모를 미안함도 느꼈다. 그녀가 울음을 언제 그칠까 훔쳐보고만 있다가,

끝이 없어서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계속 울었다.
황산과 잿빛의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밖으로 퍼졌다.
황산안개의 알갱이가 눈에 닿았는지 나는 눈이 매워졌다.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요"

의미없을 이런말을 그자리에서 남기고,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
펌프장의 펌프질소리가 내 뜀박질에 맞춰서 쿵쾅거렸다.
몇미터 더 가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열려진 컨테이너 박스 문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후로 쌍둥이를 보지 못했다.
보았지만 못본체하고 돌아선게 몇번인가 있다.

내가 잠자리와 송충이를 싫어하게 되고
팽이는 줄감는방법조차도 까먹게 되었을 고교 시절에,
나는 하교길에 그녀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쪽도 어느새 고교생이었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고, 말한마디 건네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어색하게 아무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냄새가 났다. 황산냄새, 호빵냄새, 그리고 짠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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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양파링2007-06-24 14:46
앗..
나두 송충이를 조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