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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Rayna2007-07-28 09:19조회 549추천 2
넌 나중에 뭘 할거냐.

뜬금없기도 하거니와 앞뒤 맥락 하나 재지 않고 던져진 질문 앞에 잠시 곤혹스러워졌다. 커서 뭐 해먹고 살 거냐고. 아. 글쎄요. 시선 둘 곳을 찾아 헤매는 척, 열몇 걸음짜리 거리를 눈대중으로 짚어내는 양 눈을 찡그려본다. 으례 고민하는 듯 보여지는 가운데 원치 않는 응답을 피해 침묵을 이어나가고 싶을 때 내보이는 제스처. 이 답답한 선문답이 못내 괴롭다는 듯 재차 묻는 말에 도망가듯 몇 마디 건네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답의 전부였다. 뭘 하고 먹고 살 건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 안 해봤어요. '어떻게' 살 건지를 고민해 본 적은 몇 번 있었지. 그래, 이만하면 참으로 우문우답이다.

친하지도 않고, 별로 친하고 싶지 않은 상대가(그것도 '상하' 간의 예우와 예의를 요구당하는 환경 속에서) 내 개인사들에 대해 관심을 보일 때마다 나는 그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장래에 뭘 하며 살거냐는 물음을 무슨 직장에 어느 직위로 다니면서 얼마만큼의 월소득을 벌어 살거냐는 물음과 동급으로 치환시키는 사람들 앞에선 더더욱. 불친절한 이들에게는 같은 정도의 불친절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무관심으로. 어쨌든 난 참 불편한 자식이다.


* * *



처음엔 그저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 나이엔 '예술가'가 무얼 의미하는지 설명해낼 수도 없고, 너댓살 꼬마아이가 발음해내기에도 다소 까탈스러운 푸석한 단어일 뿐이었다. 그래도 어디서 주워먹은 티는 내고팠는지, 좀 더 세세하게 풀어내자면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고팠던 한 소년의 욕심을 포장해내기에 적당한 용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사리만한 손에 계란을 말아쥐고 건반을 두드릴 적에도, 어디 이상한 홀 같은데 가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패 몇 개를 타내오고 있을 적에도 그랬고, 그 뒤로 머리 하나만큼의 키가 더 자라 난생 처음 교복을 받아들고 머리를 짧게 밀어내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저 "열심히 치고 익히고 느끼면 된다"는 생각에 헛물을 켠 나머지 막연하게 건반이나 눌러대던 순진한 인식 수준으로는 왜 갑자기 선생님이 못 보던 사람으로 바뀌어서는 스스로를 "교수님"이라 칭하라고 하는 건지. 전에 해오던 대로 날마다 한두 시간씩 연습하는 데 무엇때문에 부모 사이에 집 한 채를 내놓으니 마니 하는 소리가 오가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술학교에 '소개'를 시켜주겠다며 이름 모를 어른들이 찾아와 뉴스 자막으로나 보던 액수를 말하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든 간에 내 의지나 바람과는 전혀 관계 없는 어른들 사이의 싸움일 줄 알았지만, 그 파급력은 그전까지 아무 탈 없으리라 여겼던 내 나름의 장래 진로들을 뒤엎어낼 만큼 컸다.

열세살 되던 해 여름방학, 집 근처 성당에서 주관했던 여름성경캠프를 다녀온 내게 아빠는 조심조심 차분한 목소리로, 짐짓 심각한 척 말을 건네었다. 피아노를 도둑맞은 것 같은데. 미안하네. 어쩌지. 도둑맞았다는 자리에 깨끗이 걸레질을 하고 책장을 옮겨놓은 모습을 뒤로 한 채, 나는 "앞으로는 네가 그저 여럿들 가운데 성실한 모범생이었으면 한다"는 그들의 바람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다시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리지 않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 또한.

리듬따라, 선율따라 건반에 손을 맡기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꿈은 실상, '예술'과는 저만치 동떨어진 곳에서 홀로 낙하하고 있었다. "예술은 돈으로 만들어진 여가를 먹고 자란다"는 세간의 편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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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상Q2007-07-28 10:26
좋다
생강빵과자2007-07-30 07:17
잘 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