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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광선

캐서린2007-11-22 23:38조회 418추천 1
그녀는 나에게 춤이 되어 달라고 했다.
곧 나는 탱고가 되었다. 격정적인 리듬을 싣고 그녀는 탱고를 몸에 담았다.
가라앉은 돛을 물밖으로 끌어내 듯 나는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신성한 그녀의 햇살을 얼굴에 받을 수 있었다.
땅을 밟는 스탭소리는 내 심장의 영원이 되고
손짓과 허리놀림이 나의 또다른 울림이 되리라. 고 나는 믿었다.

나의 집은 조그맣다.
고시원이라고도, 혹은 감옥 독방이라고도 불리운다.
방은 나에게 속박의 공간이다. 무미건조하고, 탱고가 없는.
백색 형광등 조명처럼, 그것은 나에게 억지스럽게 성스럽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웹에 글을 게재했다.
내 방을 빌려드린다는 내용이었다.
비용은 여관이나 모텔보다 크게 잡았다.

전화가 왔다.
중년 남성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자.
복도 끝에서 머뭇거리다가 문 앞으로 오는 광경을 보았다.
커플은 방을 빌리는 비용의 두배를 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전화가 왔다.
중년 여자와 미니스커트에 흰 자켓을 입은 젊은 여자.
둘은 조용히 싸우고 있었다. 이죽거리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방 안에 들어간 둘은 온갖 투박하고 관능적인 소리로 뒤범벅이 된 채
1시간 후 밖으로 나왔다.
크게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사람들이 쓰고난 방은 생경한 풍경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물컹한 휴지, 시트 위에 핏자국,
벽지를 날카롭게 긁은 흔적, 아이쉐도우자국, 란제리.
콜렉션으로 갖고 싶다면 갖고 싶을 취미가 생겼다.

간혹 어떤 손님은 나를 사기도 한다.
여자가 될수도, 남자가 될수도 있었다.
나는 구분없이 기꺼이 예스라고 답했다.
그는 나를 카누로 보았고, 그녀는 나를 커다란 여객선으로 보았다.
언젠가 그들이 나를 타고 방을 선회할 때
어떤 몸부림이 하나의 환상이 되어 내게 부딪혔다.
나는 전율했고 그 이후로는 나를 팔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
그녀는 내 얼굴 가까이 와서 말했다.
나를 위해 춤이 되어 주지 않겠냐고,
나는 기꺼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그녀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고 우린 탱고를 추었다.
침대 시트 위로, 벽지 위로, 바닥 위로,
우리의 춤이 지나갔다.

길다란 기다림 끝에 다가오는 붉은 광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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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tubebell2007-11-23 12:11
개인적으로 캐서린님 글 좋아하긴 하는데....
하루키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요?

개인적으로 하루키를 싫어해서;;;
(그냥 제 느낌이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
담요2007-11-23 12:30
저도 글만 썼다하면 하루키 얘기가 나오던데-
이 얘기 되게 신경쓰여요;;;
뜬금없지만, 그냥 제 반론으로는, 하루키한테 영향을 받아서라기 보다는,
그냥 현대에 있어서 가장 많이, 가장 확실히 도드라지는 감성이 아닐까 해요.
이런 감성을 하루키가 잘 캐치하고 있고, 하루키가 워낙 유명하다보니까,
빗대어 말하기 좋은 것도 하루키가 되어버린건 아닐지요.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으로 늘어놓은 변명이었습니다.

캐서린2007-11-23 17:07
글쎄요. 하루키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작가는 쥐스킨트와 김영하, 김훈입니다.
현대적 감성이나 어떠한 영향 없이 저는 제가 읽기 좋은 글을 씁니다.
radio star2007-11-24 14:46
요즘 하루키 책 읽긴 하는데... 그다지 영향을 받았다고는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tubebell2007-11-27 00:02
맞습니다..... 담요님 말씀이 맞아요.
캐서린님 문체가 툭툭 던지는 스타일인데....
그런 스타일로 현시대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마 하루키가 아닌가 싶어서
자꾸 그렇게 판단하나 봅니다.
담요님 글은 그렇다고 느낀 적 없었구요 ^^;;;

캐서린님도 기분 나빠 하시진 말아주세요.
하루키의 글보다 캐서린님 글이 더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