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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2008-02-03 16:05조회 607추천 13

아르바이트 시간 중 제일 즐거운 때는 개점 전 국민체조다.
별관 사방에서 구령음악이 시작되면 매장 입구 앞에서 몸 구석구석을 휘젓기 시작한다.
역과 백화점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라 이른 아침부터 일반인들이 돌아다니는데,
그들과 눈이 마주치게 되어도 난 얼굴 붉히면서 열심히 체조를 벌인다.

얼마전에는 목운동을 하는 중에 목발을 짚고 있는 백발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막 오른쪽으로 고개를 회전시키려던 찰나여서 난 엉겁결에 '억'하고 소리냈다.
할머니의 눈은 두껍게 내려앉은 눈꺼풀로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내 얼굴을 보고 있음을 느낌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쓱 훑고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본관과 반대편으로 향하는 걸 보면 아마 막 지하철에서 내린 모양이었다.  
집이 멀지 않은지 얇은 조끼 단벌이었고 목발은 목재였다.
난 목을 돌리면서도 계속 그녀를 주시했다. 날 보던 시선이 불쾌해서였다.
그녀는 마치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요즘 젊은 것들은 국민체조를 박력있게 못해.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다음날에도 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각도로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불편했다.
그래도 어찌됐든, 그녀 역시 고객으로 마주할 수 있는 상대아닌가.
나는 미소를 보이며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본체만체하며 목발의 끝을 다음 거리로 내밀뿐이다.
이번에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젊은 것들 인사 받아줘봤자, 나중에 뒤통수나 맞지.."

그 다음날은 오전시차로 정오부터 일을 나갔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날이어서 장사 접자 투덜거리고 있는데,
입구쪽에서 그 할머니가 들어왔다. 뒤에서는 아들을 데리고서였다.
그녀는 아들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자켓을 하나 보여줬다.

"이거 너 입어봐, 얼른"

입두덩에서 내뱉어지듯 힘겹게 튀어나온 문장이 아들의 귀에 닿았다.
아들은 오십대나 사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그는 머리를 계속 긁적이더니,
내 얼굴을 보면서 '한번 입어봐도 괜찮아?' 라는 표정을 지었다.
난 말없이 그것을 옷걸이에 꺼내서 입혀주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항상 체조를 하던 곳 뒤에는 그 자켓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 얼굴을 본게 아니라 옷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할머니가 자켓을 보고서 아들을 떠올릴 때, 난 그녀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있었다.
도대체 나란 놈은 무엇인가. 인간이긴 한걸까. 아냐 가슴을 뜯어보면 아마 외계인이 들어있을거야.

아들은 자켓을 입어보고서 커요? 커요? 작아요? 묻는다.
할머니는 딱 맞다며 틀니를 달그락거렸고,
나는 마주잡은 손을 비벼가며 고객님에게 딱이네요, 라고 능글맞게 둘러댄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외롭지만, 한편으론 주변을 둘러싼 물 덕분에 푸근한 기분.
할머니 덕분에 난 딱 하룻동안 치유되고,
내 안을 조종하는 외계인은 잠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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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철천야차2008-02-04 04:48
아네모네 다방의 모나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