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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의 잊을수 없는 경험.

Sartre2008-03-20 01:50조회 626추천 4
글을 미리 다 쓰고나서 마지막으로 이 글을 씁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사건이었으며, 친구들한테 이야기해 줘도 재밌다는 반응이었는데

막상 쓰고보니깐 길기만 하고 굉장히 재미없네요.

-글빨의 한계를 느낍니다.-


'왠지 오늘은 엄청 긴 글을 읽고 미치도록 허탈하고 실망하고 싶어지는데?'

정도의 기분인 분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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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추웠던 2006년의 한 겨울날 이었습니다.


장한평의 한 오피스텔에 살고 있는 여자친구의 부름으로

신나게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고 갔지만-


"들어올 때 아이스크림 좀 사오면 안될까?"

라는

그녀의 외유내강한 명령에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해서

1층에 있는 슈퍼에 들어갔습니다.


슈퍼안에 사람은

점원, 저,

그리고 왠지 위험해 보이는 아저씨 한 분.

정확히 세명이었죠.

점원이야 그저 흔히보는 평범한 대학생정도의 젊은 아르바이트생이라 별로 특별할것도 없지만,

그 위험해 보이는 아저씨가 굉장히 독특했습니다.



30~40십대 정도로 보이는 얼굴,

그 얼굴위에는 며칠이나 씻지 않은듯 검은 얼룩과 수염,

자유방임주의로 자란 머리카락이 덮고 있었으며,

상당히 뚱뚱했던 몸 위로는

굉장히 더럽고 악취가 나는 펑퍼짐한 점퍼와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뭐가 들었는지 모를 검은 학생가방을 메고 있었죠.


장황하게 표현했지만,

쉽게 말하자면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노숙자와 같은 분들의 차림이었습니다.


(노숙자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서울에서 처음 지하철을 타면서 가끔 이런 분들이 타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지하철의

반대편으로 피하는 걸 보고 '서울은 굉장히 야속한 곳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 아저씨가 굉장히 화가 난듯이, 그러나 작은 혼잣말로,

물건을 고르며 욕설을 해대는 것을 들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저 먼저 계산을 한 뒤에 슈퍼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피스텔  안의 로비를 지나 엘레베이터를 타기 위해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중이었죠.



놀라운 것은,

제가 슈퍼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올때까지

물건을 고르며 혼잣말로 욕설을 해대던 그 아저씨가

어느새 벌써 슈퍼에서 나오셔서 내 옆에 서서 엘레베이터를 저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지막하게, 그러나 굉장히 악센트가 강한 욕설을 하면서..


사실 그 오피스텔엔 엘레베이터가 4대가 운행중이며,

아마도 홀수, 짝수로 나뉘어서 2대씩 운행할겁니다.

그런데 유독, 내가 기다리고 있던 그 엘레베이터 앞에서

저와 나란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부터 조금 긴장이 되었습니다.



'어느새 슈퍼에서 나왔지?'

'어느틈에 다가와서 슬그머니 내 옆에 서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이 아저씨가 설마 이 오피스텔에서 사는걸까?'

'아니면 나때문에?'

'나를 노리고?'


점점 혼자 못된 상상을 하는 중,

엘레베이터가 도착하고,

그 아저씨와 나는 예정된데로 1층에서 엘레베이터에 올라 탔습니다.



-그 즈음, 평생 구기종목 스포츠에 전혀 재능이 없던 나에게

'냉정히 생각하는 파이팅 센스를 갖추었다'라는 관장님의 한 마디로

1년 가까이 굉장히 열심히 킥복싱을 배우던 중이었습니다.

긴장은 되었지만, 혹시 모를 유사시에 잘 대처할 자신은 충만할 때였죠-



엘레베이터 안,

제가 10층을 누르고,

그 아저씨는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은채로,

그렇게 1층에서 엘레베이터 문은 닫히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부끄럽지만 조금 더 긴장했습니다)




버튼이 달려있는 엘레베이터 문 오른쪽에 제가 서있었고

엘레베이터 문 왼쪽, 그러니깐 저의 9시 방향에 그 아저씨가 서있었습니다.

그것도 나를 바라본채로,

여전히 입으론 강한 욕설을 내뱉으면서..


감히 그 아저씨의 와일드한 얼굴을 마주보면서, 그 욕설을 듣고싶지 않았기에

저는 여전히 내가 눌렀던 버튼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죠.



그때!

한층 한층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처럼

아저씨의 욕설의 톤이 갑자기 거칠어지고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저를 바라본 채로!


긴장되었습니다. 상당히........

'몸을 돌려 아저씨를 바라봐야 하나, 아니면 눈만 살짝 돌려서 확인해야 하나, 아니면 계속 무시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친구집을 가는 중, 길을 물어보는 형들에게 친절히 가이드해주며 같이 걸어가다가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갑자기 맥가이버칼을 슬쩍 보여주며 '돈 얼마있냐?'라고 묻던 그 형들의 질문에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하던 그 순간이 다시 한번 제 인생에 찾아온 것입니다.


...중립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천천히 눈을 살짝돌려 아저씨를 쳐다봤습니다.

곁눈질로 봤기때문에 흐릿하긴 했지만

아저씨의 의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아저씨는 두 주먹을 가슴까지 올리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것입니다!!

입으론 점점 더 크게 욕을 계속 하면서!


곁눈질로 주시하고 또 주시했습니다.

'오면 되받아치겠다, 오면 되받아치겠다, 오면 되받아치겠다, 오면 되받아치겠다' 되뇌이며...

...

...


'팍!'

곁눈질이었지만 확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무릎을 구부렸다 튕기면서 내쪽으로 튀어나와 오른손 주먹을 내 얼굴에 내지르려는 순간을!!!


반사적으로 위빙!

*무릎을 굽히고 U자 모양으로 머리와 어깨를 아래로 쭉 내렸다 올리며 상대방의 안면 공격을 피하는 기술


그리고 안으로 파고들며 짧고 깊은 왼손 훅!


그러나 저의 반격은 결코 그 아저씨의 얼굴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순간 느낀거죠.


정확히 말해, 위빙으로 피하고 나서 아저씨를 보는 순간 느꼈습니다.

분명히 방금 앞으로 튀어나와 저와 가까와졌어야할 아저씨는

여전히 엘레베이터 문의 왼쪽 벽에 붙어있던 것입니다.









'착각했다!!'







가방이었습니다.


가방 끈...


사실 아저씨는 엘레베이터를 탄 순간,

자신의 뚱뚱한 몸에 가방끈이 너무 꽉 끼어서

그 옥죄는 가방끈 아래, 뭉쳐버린 점퍼를 똑바로 하려고 그렇게 힘이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낑낑대다보니 힘들었는지 아니면 기분이 나빴는지

욕이 더욱더 거칠어 지고 커졌던 거죠.


그리고 곁눈질로 확인했던 아저씨의 공격 타이밍은

사실 힘들게 점퍼를 대충 손보고 다시 한번 가방을 고쳐매기 위해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양 손으로 가방끈을 잡고 그저 한번 제자리에서 튕겨 올렸던 겁니다.


저는 그걸 한쪽 눈으로 곁눈질해 보느라,

그 양 손을 파이팅자세로 착각하고,

아저씨가 제자리에서 몸을 튕기며 가방을 고쳐맬때,

주먹이 날라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혼자서 미친놈처럼 위빙하고 위협적으로 왼손 주먹을 쳐들어 아저씨를 노려봤던 거죠.

그것도 엘레베이터 안에서...



놀라움 반, 억울함 반의 표정으로

아저씨가 소리쳤습니다.

이번엔 확실히 혼잣말이 아닌 저에게 외치는 말이였죠.

"너 뭐야 이 xx야!!!!"



죄송하단 말도 잘 안나왔습니다.

'아...아........아...............죄...죄송합니다'



정말 실화입니다.

1층부터 10층까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에 벌어졌던 실화입니다.

사실 10층도 아닐껍니다.



죄송하다는 말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던 적막한 엘레베이터 안의 시간이

그야말로 억겁의 세월 같았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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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노니2008-03-20 16:29
ㅎㅎㅎㅎㅎㅎ
Xwordz2008-03-21 09:54
매트릭스 찍으셨네...;;;;;
wud2008-03-23 11:40
이제 아저씨의 일기를 보고 싶네요.
오늘은 예사롭지 않은 학생을 만나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흐흐
쇠붙H2008-03-24 16:50
웃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