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듯 부드럽게 눈을 떴을 때
남자의 눈 앞엔 커다란 구름떼가 잔뜩 끼어있었다
저물어가는 붉은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조각 구름들이었다
서로 한데 엉켜서 접힌 부분엔 주황 그림자가 번들거렸다
남자는 자신의 눈꺼풀이 자꾸 위로 말려올라가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려고 해도 되질 않았다 두 다리도,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산봉우리가 자신의 가슴과 허벅지를 아래서 위로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남자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방에서 자신과 함께 낙하하는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 옆좌석에서 자꾸 코를 후비던 중년 여성의 어깨죽지가 피를 위로 솟구치며 떨어졌고,
기체가 찢겨진 판넬, 좌석 유리창 조각들, 모터의 날개 두세 개가 춤을 추듯 회전하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이 자신의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하자 남자는 고함쳤다
하지만 그 소리도 쏜살같이 달려드는 주황빛 공기에 묻혀 이내 흩어졌다
이대로 기절해버린다면 고통없이 삶의 끝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남자의 패닉상태는 두서가 없는 만큼 길이도 짧았다
자신의 인생 어느 순간보다도 맑은 낯빛이 된 남자의 얼굴은
잿빛이어서 아름답게, 혹은 허약하게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남자는 살아보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묻혀 일그러지는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저 멀리 좌석 시트 아랫서랍이 바람을 맞으며 덜컹거리는 게 보였다
'서랍을 열면 낙하산이 있을 거야'
남자의 우뇌 구석에서 한점 빛이 흘렀다
그것은 무모하면서도 애절해서 진짜같았다
시트와 남자의 사이는 불과 2미터 남짓이었다
남자의 팔이 세배정도 늘어난다면
서랍뚜껑의 손잡이를 쥘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인간이 죽기 직전에 초인같은 힘을 발휘하는 사례가 많았다하더라도
신체의 일부분이 늘어나는 따윈 불가능하다는 것을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지난 여름 스위밍스쿨을 통해 배웠던 접영 솜씨를 뽐냈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자신의 바로 옆을 지나는 중년 여성의 팔을 집어 시트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팔은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나선형으로 돌면서 새빨간 태양 속으로 빠져갈 뿐이었다
유리조각도 던져보고 아이가 갖고놀던 장난감도 던져보았다
하지만 모두 공기의 힘에 견인되어 물러날 뿐이었다
남자의 얼굴에 구름의 틈이 갈리며 지상의 풍경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태평양의 짓푸른 물결이 자신의 몸을 갈망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남자는 서둘렀다
온몸을 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런 와중에 주변의 물건을 집어던져 시트를 맞추려고 했다
자신의 와이셔츠를 벗어서 간이 낙하산처럼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모든게 허사였다
야!
하고 저 멀리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땅쪽으로 쳐박고 추락하는 거구의 사내였다
얼굴이 새빨게져서 흡사 서양식 악마의 모습과도 같았다
그가 소리치며 말했다
그냥 포기해 그게 좋을거야
있는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여
시트 밑에 낙하산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걸 어떻게 가져다가 쓸 생각이지?
그러니까 포기해
그냥 이 순간을 즐기라구
몇초 남지 않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말이야
너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저런 석양을 본적이 있어?
우리를 위해 춤추듯이 북적이는 저 빨간 광선을 말이야
허무하게 죽음에게 달려갈 생각 말아
이미 저승에 가 있는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인기를 얻고 싶거든
이제부터 바라볼 이 풍경을 고이 간직하고 그들에게 전해주게나
손으로 귀를 모아서 집중해 듣던 남자는 갑자기 부끄러웠다
모든 것을 체념한듯, 재산을 환원한 억만장자의 표정으로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셔서 시야가 흐렸지만 분명 보이는 것은 사내가 말한 그대로였다
빨간 색조의 무지개빛이 자신을 위해 춤추고 있었다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망망대해의 정중앙이었다
추락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더라도 금방 찾아내기 힘든 곳이었다
그는 떨어지기 전부터 죽음의 운명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구조대원이 그의 시체를 물밖으로 끌어올렸을때
그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편해보였다
시트 밑에서 간신히 꺼낸듯한 1인용 낙하산을 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