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전함 포템킨
캐서린2004-03-28 14:50조회 27
무성영화와 유성영화라는 영화사의 과도기적 시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 사이에는 그다지 큰 기술적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특성을 제외하면 카메라워크나 편집으로 인한 장면효과는 오히려 전함포템킨 쪽이 우수하다. 소리가 없으니 대사의 연결이 불편해서, 되도록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던 게 아무 상관없는 컷의 충돌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몽타주였다. 사자 모습의 석상이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세 컷의 연결로 혁명세력의 힘찬 봉기를 나타낸 것이나 오뎃사 계단에서 유모차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모습과 절규하는 노파의 모습을 대치시킨 씬들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관객에게 불어넣는 데에 성공적이었다. 반면 자전거도둑은 마치 가짜 다큐멘터리를 보듯 영화 중·후반을 관객들과 비슷한 시간대로 공유한다. 컷의 연결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거나(디졸브),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위한 세부적인 숏 통과일 뿐, 그 이외에는 별다른 기교가 없다. 감독은 하나의 문제점과 하나의 주제를 1시간 반 가량의 시간 동안 줄기차게 쏟아 붓는다. 카메라 워크 역시 전함포템킨의 경우엔 Low, High 앵글의 적절한 사용으로 인물들의 상태를 적절히 그려낸 것에 비해, 자전거도둑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3인칭 시점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조용하게 쫓을 뿐이다.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좀 더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친구를 불러 반나절 동안 자전거를 찾거나 무당에게 미신을 들으러 가는 등의 자그마한 사건을 통해 관객들은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마지막엔 슬퍼한다.
전함포템킨은 총 5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건 곧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구조와 맞아떨어진다. 이야기는 전함포템킨의 선원들의 봉기와 그것의 사회적 확장까지를 집단 간의 대립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이렇다할 주인공이 없다. 영화는 선악처럼 뚜렷하게 양분된 두 집단의 갈등을 격렬하게 이어나가면서 사회적 비판의 시선을 아끼지 않는다. 바닥에 꽂히는 금 십자가, 당시엔 부의 상징이던 피아노와 은촛대가 무참히 밟히는 등의 장면은 당시 사회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결과물이다. 영화는 포템킨 선원들의 봉기를 저지하기 위해 군함들이 항구로 들어오면서부터 이야기는 절정을 맞다가 그 군함들 또한 혁명세력이었음을 알려주면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허무하고 뻔한 해피엔딩을 맞게 된다. 그에 비해 자전거도둑의 결말은 암울하다. 전함포템킨처럼 부의 격차가 큰 자본주의 사회가 배경이지만, 안토니오와 사회집단 사이의 갈등을 그려냄과 동시에 안토니오 자신의 내면세계가 파괴되는 과정도 함께 보여주면서, 여러 가지 갈등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함포템킨은 격렬한데 반에 자전거도둑은 이슬을 먹으러 가는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이 세상에서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의 한 단면을 더디게 쫓아가면서 그려내는 부자의 심리묘사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관객의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전함포템킨을 어려운 수학문제를 쉬운 공식을 통해 한꺼번에 풀어내는 것에 비유한다면 자전거도둑은 공식 없이 끙끙 앓다가 겨우겨우 풀어낸 식이다. 그만큼 영화 끝에서 보여지는 결말은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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