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timistic - RadioHead
그녀는 아예 탁자에 엎드렸다. 그리곤 흑흑 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량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그녀는 내내 울기만 했다.
그녀는 직장 동료였는데, 글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미인이어서 나도 약간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나이도 나와 동갑인데다 입사 시기도 비슷해서 '직장 동료로서' 친하게 지냈다.
어느날 그녀가 침울한 표정으로 내게 와서는 퇴근 후 함께 술 마시지 않겠냐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거절해서는 안 될 상황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말할 때 그녀의 눈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비극을 보고 왔노라고 고백하는 듯한,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
잭 다니엘스 온더록을 한 모금 들이키자마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나쁜 자식, 어떻게 나한테,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야 할 지, 그냥 울게 내 버려두는 것이 나을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무슨 일이길래... 라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묻자마자 다시 위스키를 마시고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에서 나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나를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는 굉장히 힘들었다. 아무튼 그녀는 두 시간 내내 울었고, 나는 가끔씩 내뱉는 그녀의 혼자말을 통해서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정은 지극히 간단했다. 애인이 다른 여자와 잤다, 그 뿐 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울고 싶을 땐 원없이 우는 게 최고다. 마구 아무데나 대고 퍼부어대다 보면, 기분은 나아지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며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 오른다. 그런 법이다.
그녀는 술집 밖으로 나오면서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웃었다. 술집 안에는 두 시간 내내 빌리 홀리데이 노래가 흘러 나왔는데, 우리가 거기서 나갈 때에도 여전히 빌리 홀리데이었다. 저런 노래를 트니까 여자가 더 맘놓고 우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듀크 엘링턴 악단의 빵빵한 브라스 섹션이 제격이란 말이다.
차를 가지고 가기엔 나는 너무도 취해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 역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역의 계단을 내려가며 계속 웃었다. 내내 울더니 이제는 웃어? 하고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해 말했다. 엄청나게 취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7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11시 45분인데 과연 전철이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게다가 그녀와 나는 집이 반대방향이라 그녀를 전철에 태운데도 내가 탈 전철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고 나서 택시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 혼자 택시에 태우기엔 그녀는 너무도 미인이고 너무도 많이 취해 있었다. 전철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고 나는 생각했다.
걱정은 현실이 되어, 전철은 청담행밖에 없었다. 위로 다시 올라가기도 그렇고 해서, 일단 전철에 탔다. 그녀는 타자마자 의자에 쓰러지듯 누웠다. 나는 몽롱한 상태로 반쯤 눈을 감은 그녀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전철이 잠시 후 청담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면서, 계속 배시시 웃으며 씨발씨발 하고 중얼거렸다. 역 밖으로 나와서, 나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다. 마침 앞을 지나가던 택시가 멈춰섰다. 나는 그녀를 태우려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때, 그녀가 말했다.
"저어, 응, 우리 집에 가자, 응? 성철씨, 응?"
그녀는 나를 향해 다른 남자의 이름을 말했다. 분명 집에 가자는 것은 유혹이지만,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다. 술기운 때문인지, 머릿 속에 온갖 영상들이 나타나 뒤범벅 되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다 택시 뒷자리에 태웠다. 그리고 기사에게 3만원을 주며, 그녀의 집 위치를 자세히 말했다. 자동차 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그리고, 택시를 보내 버렸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내가 한 일을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유혹을 거절한 것이다, 어디 가서도 보기 힘든 미녀의 요구를 택시와 함께 떠나보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치 손에 쥐고 있던 와인 글라스를 떨어뜨린 듯한 견디기 힘든 박탈감이 온 몸을 옥죄어 왔다.
거리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거리엔 자정에도 사람들이 넘쳐 나던데 여기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이곳에 와 본 적은 있지만, 자정이 넘어서 청담동에 오기는 처음이었다. 이처럼 한산하고 을씨년스러울 줄은 몰랐다. 가게들은 전부 셔터를 내리고 불이 꺼져 있고, 도로에도 자동차는 드물었다. 조금 걸으니, 리베라 호텔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택시라도 잡아타고 집에 들어간다면 틀림없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 자신이 싫어질 것이다, 이런 몸과 정신상태로 집에 들어가서 좋은 기분이 생길 리가 없다, 그렇다고 여관이나 호텔에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그런 행동의 결과는 극단적 자기 혐오 뿐이다, 호텔 방에서 숙취에 부들부들 떨며 혼자 눈을 떠서 전날의 일을 돌이킬 때 내가 느낄 감정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카페를 찾으려고 했다. 책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보내면 된다, 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문을 연 곳은 편의점이나 음식점들 뿐이었다. 설렁탕이나 소금구이를 새벽 5시까지 먹으며 버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거기서 생각이 멈췄다. 길 건너의 PC 방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기분과 그녀에 대한 간단한 위로를 써 보내자, 다음날 그녀가 그걸 읽는다면 위안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PC방으로 들어갔다. PC방은 네댓자리를 빼고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 탤런트와 매니저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포트리스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자리에나 앉은 뒤, 음료수 하나를 종업원에게 부탁했다. 스피커를 켜고, 음악감상 사이트로 접속했다. 무슨 곡을 들을까 하다가, 래디오헤드 앨범이 눈에 띄어서 플레이 버튼을 클릭했다. 'Kid A' 앨범이었다. 종업원이 웰치스의 딸기 음료를 가져왔다. 나는 딸기맛이 나는 느끼한 탄산음료를 한 모금 들이킨 뒤,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생각해 내려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스피커에서는 탐 요크의 분열증적인 목소리가 한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졸음이 몰려왔다. 미디어 플레이어에는 곡의 제목이 표시되어 있었다. 'Optimistic'이다. 톰 요크가 귀신이 되어 버린 듯한 으시시한 소리가 한껏 울려 퍼지고, 심작 박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듯한 드럼 루프가 귓전을 자극했다. '우~ 우~ 우~'하는 허밍은 나에게 테마가 있는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자신이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한, 언젠가 꾼 악몽을 상기시키는, 모태에서 양수에 잠겨있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불안감이다. 나는 모니터 앞에 엎드려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지하철 종점에 와 있었다. 전철 안이었는데, 전철은 순환선인 모양인지 문을 다 열어놓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밖을 보니 해가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아침 6시 반 경이었다.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밤 사이의 일들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몇 개의 영상들이 단편적으로, 영화에서 잘라낸 스틸 컷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로수 밑에 오바이트를 하는 장면, PC방에서 비틀비틀 나오는 장면, 그녀의 술에 취한 모습, 그리고 그와 함께 귓가에 계속 울려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다름아닌 'Optimistic'. 톰 요크의 울부짖음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 리플레이 되었다. 나는 소리를 버럭 내지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냈다. 개찰구를 빠져 나왔다. 전철 종점은 내 집에서 1시간 정도 거리였다. 전철을 갈아타거나 택시를 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길을 걸었다. 야구 연습장의 찢어진 그물이 인도 위에까지 늘어져 있었다. 추운 아침의 공기가 얼굴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어제 그녀의 집에 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이런 극도의 자기 혐오를 느끼진 않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순간 또다시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톰 요크의 목소리였다. 술에 취한 채 들었을 때는 으스스하다는, 귀기가 어렸다는 느낌이 들었었지만, 아침의 찬 공기와 부대끼며 머릿속을 유영하는 그 소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그래, 차라리 아름다답다고 느껴졌다. 그녀를 혼자 보낸 것은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짖밟지 말라고 그 노래 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미소지으며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다음날, 밝게 웃으며 나타났다. 어제는 고마웠다고 말했는데, 나와 술을 마셨다는 사실까지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극도의 아름다움은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위험하기 그지없다. 나는, 'Optimistic'을 들을 때면, 반쯤 감긴 그녀의 눈과 벌려진 입과 술에 취해 걷던 거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미소짓는다. 톰 요크의 목소리에는 아름다움의 위험을 중화시키는 힘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밤새워 고통 속에서 느꼈던 것이다.
..제 홈페이지(http://imazine.hihome.com)에 업데이트한 글입니다. 이후, Creep과 Exit Music, Airbag이 쓰여질 예정이니까 관심 가져 주세요. 래됴헤드를 싸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