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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nesiac을 들으며

loser 2001-05-08 06:17조회 135추천 7444
이건 워밍업 겸으로 어느 친구 게시판에 쓴 라디오헤드 관련 잡문입니다. 한 번 올려볼께요.



아날로그한 어쿠스틱이니 어쩌니 하면서 키드 에이 앨범과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말은 루머였군요.

잉여반이란 말은 반 농담이고 어쨌거나 이런 식의 앨범은 짜투리반이란 개념이 지배적일텐데 그런 선입견에 죄의식을 느낄만큼 좋네요.



솔직히 말해 키드 에이보다 귀에 잘 들어옵니다.

You and whose army같은 평범한 라디오헤드 형 발라드가 참 반갑게 젖어드네요.

부틀렉으로만 들었던 knives out의 제대로 된 버전도 정말 멋지군요. 비나 한 바탕 쏟아지면 황홀했을텐데.



쥐아르닷 군의 대전은 비가 내린대요. 라디오헤드 신보 엠피 보따리가 있는 비밀의 출입구로 안내해 주면서 구름이 이쪽으로 올거라고 아름답게 축성해 주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보고 다시 안 본 그들의 다큐멘타리 영화, [Meeting people is easy] 를 오늘 아침 밥 먹으면서 두 번째로 봤는데요.



밴드 프로모션을 넘어선, '매체'에 대한, 매체 안에서의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서 감동 받았다는 한 친구의 말을 깔고 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이들은 설령 자진해 스내플 CF를 찍는다 해도 그 조작된 몇 초간에도 그들만의 비감어린 실존으로 필름을 적실 수 밖에 없다고 , 왜냐면 그것이 그들의 절대적인 , 그러나 처음부터 그들이 선택한 운명이기 때문에, 그 운명안에서 단 한번도 공허한 농담을 하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그 선택한 운명은 그들이 담기는 틀과 상관없이 늘 진실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어마지 않던 신앙기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 , 과연 라디오헤드 답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재미는 없었지만.

스타 다큐멘타리에선 기대하는 것들이 대체로 뻔한 법 아니겠어요? 제 잘못은 아니예요. 스타들의 극화된 일상을 비감어린 선정성으로 도배한 이색 프로모션 파노라마를 볼 수 있구나 하는 기대는 어느 정도 당연한 거니까요. 물론 그 당연한 기대는 Meeting people is easy에서 아주 지루하게 배반당하지만 :')



자신들의 독무대에서 매체라는 틀을 먼저 내세운다고 하지만 그 틀이 완전한 폭력이다 라는 식의 , 안이한 반골정신으로 러닝타임을 채우고 있지도 않더군요. 처음엔 매체내에서 라디오헤드가 라디오헤드적으로 느끼는 실제라는 식으로 해석했었는데 아니었어요. 그나저나 매체는 폭력이다 란 말이 언어 쓰레기가 되는 비운의 시대를 살고 있은지 얼마나 오래된 건지.



카메라 앵글안에서 고개 숙인 채 움직이는 그들은 대단히 순종적입니다. 당신 인생에서 음악이 뭐냐 따위의 지긋지긋한 질문에 대해 톰 요크는 수줍고 겸연쩍게 시선을 돌리면서 미소짓습니다. 스타들이 기자들에 대해 의례 표시하는 거만한 피곤이 그의 얼굴엔 잘 비치지 않습니다. 히스테릭할 때가 없는건 아니지만 학예회에서 맡은 중요한 배역을 욕심만큼 형상화하지 못해 자신에게 심통을 부리며 우는 아이같은 느낌이 더 강합니다. 해서 시키는대로 열심히, 고통스럽게 반복하지요.



그들을 아주 감동적인 단순성으로 물신화한 매체에 대한 밴드 멤버들의 태도는 그래서 무기력하고 우울해 보이지만 그것이 사실 엄연한 공조체제로 시작되었고 여전히 그들은 성실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고백을 주로 하고 있는 것같아요.



그 유명한 no surprises 비디오를 찍는 장면은 그래서 처음과는 아주 다르게 다가왔어요. 아시다시피 익사를 통한 자살 제스처를 보여준 이 뮤직비디오는 이제 전설이 되었지요. 물 속에서 톰 요크는 정말이지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는데 이것은 요크의 재주라기 보다는 고문에 가까운 반복 촬영 끝에 간신히 건져낸 수확임을 그 장면은 보여줍니다. 정해진 시간만큼 숨을 참지 못해 엔지를 내던 톰 요크는 나중엔 화가 나서 머리를 뒤흔들고 발을 구릅니다. 그 분노는 진정성을 비디오로 찍어 팔아 먹는 음악비즈니스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짧은 호흡을 가진 자신의 무능력(@f0)에 대한 것입니다. 애 같지만 치기가 없는 이유는 그때문이었나봐요.



예전엔 이들의 예술적인 촉수들이 매체안에서 어떻게 잔인하게 뽑혀나가 왜곡되는가를 팬들에게 호소하는 라디오헤디즘의 절정 이란 생각만 했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속으론 '아티스트의 천형이 저리 괴로우면 다 때려치우고 귀농 백만장자로 편히 살지' 란 생각을 몰래 하기도 했죠. 아, 신성모독의 괴로움이라니.



오늘 보니 그것은 합의하에 펼치는 상잔극의 클라이맥스였던 겁니다. 그걸 라디오헤드는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고통에 나르시시즘은 진실이 아니었던 겁니다. 안팎으로 말이죠. 다만 틀 안에서의 우울하고 천진하기 까지한 성실성이 진실일 뿐이죠. 와, 여기까지 발견하곤 대단히 감동했답니다.



이들은 실존적 부조리에 대한 진지함이 지나쳐 얌전하게 맛이 간 미치광이 페르소나를 다채롭게 변주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매체의 앵글은 그렇게 그들이 선택한 진실을 군더더기 없이 확장하거나 드라마틱하게 비약시키는 것으로 그들에게 대응했습니다.



상호착취성에 기반한 친교. 자본주의 사회안에서의 문화 시스템 생산자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관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조금 슬프기도 했습니다. 주.종의 역할을 시간 차를 두고 주고 받을 수는 있어도 그 역할 구도 자체를 와해시킬 수는 없는게 모든 관계의 기본이구나 하면서 다른 감상에 빠지고 말았죠. 그럼에도 어떻게든 성실하자라는 그들의 태도는 거의 숭고하기까지 하구나 라는 감동은 물론이구요.



그래도 초기엔 그 체제가 억압이라고 말했었으니 매체에 대한 이들의 입지는 성장형인 셈입니다.

한 때는 공연 때 Creep을 부르기를 히스테릭하게 거부하기도 했다가 'I'm a winner'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발에서 수천명의 팬들이 Creep을 부를 때 톰 요크는 오래 묵힌 체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관용의 미소를 머금은 채 관객들을 향해 마이크를 대고 있다가 후렴구에 이르러 가슴을 움켜쥐고 절창합니다. 한 때 증오의 낙인을 찍었던 one hit single을 부르는 그의 모습은 위악이 전혀 없는 성실함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Creep 이 상처였다면 그는 그 상처를 감동적으로 치유하는 과정을 공연때마다 반복해 보여 주겠지요.

(어느 공연에서 이 상은이 온갖 장난을 치며 '담다디'를 불러대고 관객들은 박장대소하며 그의 비틀린 회고 행위를 받쳐 주었다던데...으흐)



올해 가을에 일본 공연이 있답니다. 우리 나라에서 접선을 해 봤는데 공연 의사가 없다고 통보가 왔다는군요. 친구 보러 한 번쯤 일본에 가야될듯 한데 맞춰서 가 볼까 계획중입니다. 과연?




추신. 톰 요크의 어록 중에서 :

묘비명 - 나는 기다렸지만 당신은 결코 오지 않았다. (I waited but you never c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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