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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gig!

elec2004-01-24 17:46조회 908추천 43
올해도 축제를 하고 어김없이 우리는 무대로 올라가야 해요.
작년엔 아니었을지 몰라도 올해만큼은. 마지막이니까. 남들이 뭐라 해도.

작년에는 이렇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저는 선배들에게 제대로 말도 꺼내보지 못했고
막판에 보컬이 파토를 내어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러야 했었죠.

올해는 아니에요.
비록
남게 되는 건 저 하나 뿐이지만. 나름대로 부족하지만
밴드리더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다 떠나가기 때문에, 녀석들 모두 바빠 시간없어서 제 때 다같이 모이는 경우는 드물지만
같이 연주할 때면 다들 황홀해집니다.

우리는 실력이 많이 모자라요. 완전 초보자에 중구난방이죠. (고등학교 음악 '동아리'일 뿐.)
베이스 치는 녀석은 손가락이 여려서 플랫을 짚을 때 물집이 생기고, 기타치는 놈은 (제 옛날 룸메이트인데)솔로할 때마다 삑사리를 한두개씩 꼭 내야 직성이 풀리고, 드럼을 치는 저는 손목도 제대로 풀지 않아서 16비트 필인을 하다 보면 박자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아요. 가끔씩 스틱을 놓치기도 하고요.

앰프는 노후되어 자체저항이 무진장 커져서 출력도 제대로 안나오고
기타는 픽업이 빠져 드라이버를 쥐고 손수 고쳐야 했고
베이스도 오래 되어 브릿지가 지나치게 높아져 짚기도 힘들고
심벌은 크래쉬만 달랑 두 대. 드럼피는 사정없이 구겨져있고.

그래도 좋아요. 그저.
그저 좋아요.
실수연발에 어찌보면 원곡을 모독하는 짓거리가 될 수도 있는 그 행위가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잘 압니다. 어떻게 해봐도 그 밥에 그 나물이고
어차피 즐겨봐야 두 시간도 못되지만
이제 그 애들하고는 (최소한 일년간은) 헤어져있어야 하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데
그리고 다들 그 위에 있을 때면 누가 보든 안보든 간에 행복하다는데..

그 즐거움을 위해 오늘도 모이기로 했어요.
비록 군산에 눈이 많이 와서 키보드 치는 녀석은 오지 못한다지만
올 수 있는 애들하고라도 같이 준비하려구요.
그리고 즐기려구요. 그 순간을. (이상하게 시간이 금방금방 가데요)
보고싶었던 녀석들. 잘 왔구나. 자, 시작하자...

축제가 지나갈 때까지
잊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뭐라고 할 권리는 없어요.
축제날 오후, 증거물 B Summer Collection(이름을 이렇게 지었어요;)의 이름으로
각자 맡은 파트를 향해 걸어갑니다.
튜닝을 하느라고 잠깐 피드백이 일어날 테고
이제 됐다는 신호를 보내면
강당의 상단에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에는 아무 것도 없을 거예요.
우리만 남는 거죠.
꼴에 스틱을 네 번 딱딱 두드리고
리프가 얹혀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 부터 우리는 즐깁니다. 실수는 중요하지 않을거예요. 아마도. (가을 바람처럼 쓸쓸할) 박수소리로 중간중간에 환상을 깨워야 한다는 사실이 불만스럽지만..
그리고 마지막 곡인 Let it be를 두 명의 보컬이 나와 부르고 나면
우리의 환상도 끝나겠죠.
그리고 각자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다시 만나서 그때 그 연주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나서 저는 일년간 잊고 지낼 겁니다. 아쉬운 손목만 조금씩 자근자근 풀어주면서 지내려고 해요.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정말 중요한 거네요. 마지막 곡을 할 때 눈물이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오후 3시에 온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걸요.
다 모여서, 강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앰프를 점검하고, 드럼 세팅하고.. 준비가 모두 끝났어요.
그리고 밴드 리더가 외칩니다.


"자, Let's g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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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담요2004-01-24 18:29
멋져요. 부러워요.

챔피언!
……2004-01-25 00:32
>_<
capi2004-01-25 06:57
잠깐 잊어버렸다; 너네 축제는 겨울이지?(참참=_=)
한다는 얘기 듣고, 우리 축제 생각하고선...
그 딱 수능 100일 즈음인 그무렵을 상상했다지;;;
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