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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슈퍼에서 있었던 일.

Radiohead2006-04-11 13:46조회 352
무료하게 TV를 보다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한 후

슈퍼에 가 시원한 맥주를 사들고 와서

마시고 자면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 즉시, 행동에 옮겼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와 몸을 하고는

슬리퍼를 끌고 슈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걸어가면 대략 2분 20초쯤 걸리는 곳에

위치한 자주가지 않는 동네 슈퍼였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었고

슬리퍼 안에 맨발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이 좋았고

기분도 상큼했다.


슈퍼엔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고

나는 맥주를 사기 위해 냉장고 앞에 섰다.

늘 그렇듯이 하이트와 오비, 카스를 앞에두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가

쌀이 첨가된 오비 큰 캔 3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 앞에는 나 말고도 여명808을 사러 온 30대의 여자와

음료수를 사러 온 여고생, 우유와 담배를 사러 온

20대의 남자가 있었고, 그 다음으로 도착 한 것은 나였다.

그리고 내 뒤로도 약 3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터 안엔 지난 14년 간 카운터를 보던

아저씨가 있었고 아저씨의 손과 머리는 계산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저씨의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보고 있었는데

여명808을 3개 사가던 여자의 계산이 끝나자

나는 퍼득 불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냥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는

주머니에 들은 것이라고는 말보루 레드 한갑과

빨간 라이터, 핸드폰, 열쇠, 그리고 만원짜리 한장이 전부였다.


그랬다.

민증이 없었다.

여전히 아저씨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며 이미 여고생의

음료수값을 계산해 주고 있었고

나는 점점 더 불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주 오지 않았지만(아니, 그래서였겠지만)

제발 제발 내 얼굴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내 나이 스무여덞에 신분증이 없어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정말 그랬다!

동네 슈퍼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카운터 주변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더더욱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였지만 내 입술은 바싹 말라가고 있었고

내 머리속은 아주 빠르게 움직이며

앞으로 일어날 여러가지 상황에 대처 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리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것은

제발 내 얼굴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였다.


카운터에 올라가 있는 맥주 3캔 위에 얹어진 내 손은

자신감이 없었다.

마침내 우유와 담배를 사러 온 남자의 계산이 끝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 왔다.

지옥같은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학창 시절 음악 실기시험 시간에

내 앞 번호의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마치고 내 차례가 다가 온 것과 같은 느낌 이였다.


나는 차마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산대의 돈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맥주를 봉지에 담으면서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동안

내 얼굴을 한번 휙 쳐다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드디어 모든 것이 끝장났구나.. 라는 생각과

제발.. 제발 나를 알아 봐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찰나에 순간이였지만

머리속은 많은 생각들로 복잡했다.


'79년생이라고 얘기를 하면 믿어 줄까?'

'아니야, 모든 게 끝장났어. 나는 이제 끝이야..'

'그래도 14년 간 다녔던 슈펀데 기억해 주지 않을까..'


그 짧은 순간에 돈통을 바라보며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아저씨는 돈통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힐긋 쳐 다 보고는 그대로 맥주값을 계산하고는

잔돈을 내게 거슬러 주었다.

그랬다. 아저씨는 내 얼굴을 기억해 주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미성년자처럼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이건 그냥 내 심증이지만 아저씨는 내 얼굴을 기억했던 것 같다)


이제 내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이 시원하게 내려 갔다.

드디어 나는 슈퍼로 부터 해방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검은 봉지에 든 오비 맥주 큰 캔 3개를 들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이 글을 쓸 수 있게 된거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 준

무료한 TV와 슬리퍼 안에 맨발을 간지럽히던 시원한 바람과

14년 간 카운터를 지키던 아저씨와

그 외 여고생, 30대 여자, 20대 남자와 우유 담배 맥주에게 감사한다.


나는 오늘도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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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馬군2006-04-11 15:08
호 라디오헤드님 얼굴 궁금해요 ㅎㅎㅎ
상Q2006-04-11 22:55
췟 스물여덟이라니... 형도 늙었군!!
SweetradiO2006-04-12 01:16
오비보단 카스;;
녀찬2006-04-12 02:39
공형 늙었어... 당신의 글은 늘 손에 땀을 쥐게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달리2006-04-12 10:56
혹시 아저씨가 쪼셨던게 아닐까요?
Radiohead2006-04-12 11:46
나는 늙지 않았어!
으릉!!
死색2006-06-13 03:34
이제는 20대로 보인다구! 곱던손도 저번에 보니까 까칠해진것 같았어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