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비니 트랩
캐서린2006-10-10 02:25조회 552추천 18
여행은 삶의 도처에서 시때없이 산재해 있다. 출근을 위해 하이힐을 신거나
엄마의 심부름으로 슬리퍼를 신는 것 모두 오늘 하루의 여행준비다.
여자친구가 오랜만에 귀국했다.
8개월만이라고 서로 처음 마주대하자마자 내뱉는 한마디가 어색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8개월을 헤아렸다. 그러니까 삼십곱하기팔에 이십사곱하기...
숫자는 천이 넘어가면서부터 숫자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우리 파티를 열자
내가 말했다. 신촌에 이화여대 앞 어느 모텔에서 말했다.
애인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8개월동안 이화여대에서만 노숙해온 남자 부랑자라도 된듯
입을 양옆으로 죽 뻗고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그래라고, 그녀는 대답했다.
편의점에서 삿뽀로 비루와 감자칩 그리고 양파맛이 나는 빵을 사고 짜파게티도 샀다.
군대에선 이렇게 먹는다니까..! 그녀에게 말했다.
먹는방법이 따로 있어 이따가 보여줄게. 나는 진심으로 헌신적으로 그녀를 대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불쾌한 기분으로, 살짝 째려보는 눈빛이 내 뺨을 후볐다.
피자씨에게 작은 피자 한판을 사고 빵집에서 소라빵2개와 폭죽을 샀다.
이것으로 파티준비는 끝났다. 우리는 다시 모텔로 돌아갔다.
방 안이 더워져서 에어컨을 켜고 잠시 침대 위에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며 잠이 아닌 잠을 취했다.
눈을 뜨고서도 잠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꿈인지 모를, 내가 지금 상상하면서 떠올리는 형이상학적인 색채 이미지들이 천장 주변을 동그랗게 이끌다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코를 골았다. 그녀가 깔깔대며 웃었다.
피자를 펼치고 양파맛이 나는 빵조각을 케이스 위에 곱게 펴올렸다.
양반다리하고 앉은 위에 맥주캔을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소라빵2개는 피자 옆에
포크나 수저 놓듯 얹었다. 방이 좁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침대위에서 장식했다.
으악!
어느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편의점에서 산 물건들을 차례차례 개봉하고 있을 때였다.
너무나도 소스라쳤기 때문에 바로 옆에서 피자 토핑을 꾹꾹 눌러보며 그것의 엠보싱을 확인하던 여자친구 역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둥그렇게 쳐다봤다.
저,젓가락이 없어..!
짜파게티를 먹으려고 준비했는데, 젓가락을 얻어오질 못한것이다. 그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핵을 만들긴 만들었는데 그것의 보관창고와 발사대와 발사버튼을 만들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쩐다지..?'
나에게는 외출에 있어서는 좋지 않은 버릇이 하나 있다.
굉장히 죄악스런 버릇이라 여기 적어놓는 것도 죄악스럽다. 이것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여행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여행에도 격식이란 것이 있다. 그것이 비록 무전적인 것이거나 자전거로 가볍게 떠나는 것, 아니면 바로 집 앞, 코앞에 있는 구멍가게를 나서더라도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이 있으니 항상 격식을 차려서 나가야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봤다. 파티를 위해 거추장스런 겉옷을 모두 벗은 탓이었다.
귀찮아,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사실은 여자친구가 들릴정도의 성량이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피자만 만지작거리고 있을뿐이었다. 침대옆 화장대에 놓인 짜파게티 두봉지가 애처롭게 나를 응시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다시
발에 은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그 위에 뉴욕양키스의 양말을 신은 뒤 다리미로 와이셔츠의 목깃을 반듯하고 다리고 줄을 세워 입은 다음 여자친구에게 부탁해 넥타이를 narrow 방법으로 묶게 하고 테이프를 조금 뜯어 둥그렇게 말아서 자켓과 와이셔츠에 붙은 먼지들을 충분히 떼어냈다. 미리 준비해놓은 구두약을 듬뿍발라 검은 금강제화 구두에 광을 내고 침도 여러번 뱉는 것으로 물광을 대체한뒤, 모텔에 비치되어 있는 향수를 겨드랑이 3센티 밑과 얼굴 전체에 뿌린 다음 여자친구에게 바이바이 잠깐 외출하고 올게 늦진 않을거야 전화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핸드폰은 여기 두고 갈거니까. 아무에게나 문 열어주지마. 암호는 내가 문을 두닥닥, 닥 하고 두드리는 것으로 하자. 잘 외워둬 그럼 갔다올게. 사랑해. 잊지마. 라고 말하는 것으로 외출에 나섰다.
편의점은 우리가 묵는 모텔에서 30미터나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로손보다 친절하진 않은 미니스톱으로, 종업원은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혼자였다. 신촌에 있는 편의점치곤 의외였다.
방은 7층에 있었는데, 투숙객이 얼마 없어서인지 한번의 끊김없이 바로 1층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양옆으로 붙은 거울에는 내 모습이 10개 더 있다. 나는 나의 10개의 뒤통수에 대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딩동. 굉음을 달며 문이 열렸다. 카운터를 보는 젊은 여자가 모텔이름이 적힌 비닐봉지에 나무재질의 빗을 담고 있었다.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혹시나해서 나는 물었다.
"저기,여기, 젓가락 갖고 있으세요?"
여자는 웃었다. 그런거 없거든요. 웃었지만 불만스런 대답이었다. 그녀는 젓가락을 갖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있었지만, 자신도 짜파게티를 먹어야했기에 나에게 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혀를 찼다.
편의점에 도착하기 까지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이화여대생으로 추정되는 여성 2명과 마주쳐오는 남성노인1명 있었고 열외는 없었다. 역시 격식을 차려 입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종업원은 새우깡이 담긴 종이박스를 창고에서 꺼내는 중이었다. 나는 껌을 사면서 젓가락을 달라고 할지, 혹시 여기 정리하다가 젓가락을 줍진 않았는지 둘 중에 어떤 방법으로 물어볼까 생각했다. 생각하는 중에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안경테가 검게 짙은 색이었다. 당황해서
'젓가락 주세요 두개"
예의 방법을 잃고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새우깡박스를 든채로 턱으로 카운터를 가리켰다.
삼양라면에서 주는 젓가락이 꽂혀있었다.
젓가락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암호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두들겨졌다. 여자친구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동안 아픈데는 없었는지, 그리고 나를 위해 꽃이나 선물은 사가지고 오질 않았는지 물어보고 자켓을 벗겨주었다. 피자는 아직 식지 않고 미지근함을 유지했다.
우선 피자부터 먹자. 나는 말했다. 폭죽을 아무데나 대충 터뜨리고 피자를 씹었다.
우리 파티를 열자.
우리 젓가락을 사자.
우리 피자부터 먹자.
우리라는 말이 내생에 최고로 정답게 들리는 10월의 어느날,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왠지 몇년전의 세기말적 분위기를 풍기는 야간의 어느 모텔방이었다.
8개월의 시간은 물에 녹는 비타민씨처럼 우리의 목구멍 안에서 진득하게 녹아 위 안으로 들어갔다.
피자와 녹아든 8개월은 알맞게 영양분이 퍼져서 우리는 작은 돼지처럼 핑크빛으로 살쪘다.
'나 좋아?'
'응 좋아'
뭐 이런 느낌으로 나와 그녀는 12시까지 파티를 열었다. 노래는 없고 파티인원은 적고,
윗층에서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나누는 육감적인 소리만이 파티를 이루는 정적을 깨고 있었다.
사랑한다 사랑해. 8개월이 8년이 되어도. 사랑한다 사랑해.
4배속으로 빠르게 말했다. 속청에 능한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두 눈을 귀엽게 뜨며
고개를 8개월치로 빠르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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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개
애기고기2006-10-10 03:27
ㅎㅎ 좋다
까이유2006-10-10 12:46
아으, 왠지 반가워라 -
포르말린2006-10-21 04:34
부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