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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na2007-04-22 10:11조회 743추천 29
다시 한 번, 그 사람이다. 전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 똑같은 공간 속에 함께였던 것이. 목련이 봄을 새하얗게 흩날리던 날. 언제나처럼 통영으로 향하는 편도 티켓을 - 나는 '돌아오는' 길을 고민하지 않는다 - 손에 말아쥐고 차에 올랐다. 옆자리에 앉아서도 늘 그래왔듯, 서로 돌아앉아 짐짓 아는 체 모르는 체, 이따금씩 시선을 힐끔 흘려보내며 음악을 틀었었지. 가는 내내 무얼 들어야 할지 고심중이던 찰나, 모처럼 Bel Canto가 울려나왔다. 반가운 이름. 그간 오래도록 이름만 떠올린 채, 귓가에 닿을 길 없었던 음악들이 잇따라 꿈 전체를 간질이기 시작한다. 물감이 붓을 따라 화지 위를 미끌어져 내려가듯.

차가 커브를 돌아 국도를 벗어날 즈음,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훔치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푸훕. 너, 잘못한 거 있지. 놀리듯 웃어보이며 보조개를 그려보이는 그이 앞에서 시선이 흔들리고, 노래가 멈추고, 물감이 얼굴 위에 벌겋게 번져나간다. 아니야- 음, 에.. 뭐가. 그냥, 미안해. 모른 체해서. 내내 표정이 너무 평안해 보여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어. 왜. 그냥. 깨고 싶지 않았어. 차마 그 침묵을 깰 용기가 없어서라고는 말 못하고, 애써 핑계만 토막토막 늘어놓는다. 또 웃는다. 장하셔요. 언제부터 그렇게 점잖아지셨어.

귀엽네. 손과 손등이 맞닿는 순간의 저릿함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선홍빛으로 번진 볼에 민들레빛 연꽃 만큼이나 온화한 미소가 겹쳐졌다. 때로는 곁에서 존재감을 투영해 주는 것만으로도 외롭지 않을 수 있어. 말로는 마저 채워나갈 수 없는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거. 그걸로 충분해.

꿈은 꿈일 뿐이고, 그이와 나 사이의 '거리'란 현실과 꿈 사이의 간극 만큼이나 멀기만 하고, 꿈의 말미를 흐려놓았던 그 말들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가늠하기에 난 그간 너무도 잘 살아오질 못했다. 같은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 속으로 늘 장벽을 맞댄 채 대해야 했던 사람. 민들레빛 연꽃만큼이나 밝은 그이의 모습 앞에서 나는 늘 구석에 드리운 그림자 같았다. 나는 그이를 대하기가 더욱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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