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에 관한 남녀의 생각
연지2007-10-29 02:42조회 500추천 5
재밌네요.
순풍산부인과 작가들이 쓴 글이랍니다.
길긴 한데 읽을만해요.
#시추에이션
나(여)와 김작가(남)은 1995년 SBS코미디 공채 작가에 합격하면서 처음 만났다.
당시 난 초보 운전자였는데, 나와 동네가 비슷했던 김작가는 같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런데 세 살이나 어린 녀석이 어느 날부터 서서히 흑심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에게 고백을 해 오기에 이르렀다.
그때 그는 분명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약에 어떤 이벤트를 벌였는데, 내 여자가 그 이벤트를 이해하지 못하면 참 답답할 것 같아. 하지만 너는 아이디어가 풍부한 방송작가이니만큼 내가 준비한 이벤트를 잘 이해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는 사귀어야 해!”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이렇게 생각했다. ‘오~연하라 다르긴 다르군. 이벤트깨나 할 모양이야.’
하지만 내 예상은 정확히 빗나갔으며, 이벤트는커녕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다 받는다는 프러포즈마저 받질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나름 시트콤 작가 커플이 신기했는지, 10여 개의 월간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하나같이 프러포즈는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해왔다. 프러포즈를 못 받았다고 대답하면서 난 내가 귀한 신부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굳게 맘을 먹고 김작가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프러포즈 해줘.” 그는 하겠다고 대답했다.
결혼 1주일 전에도 닦달했다. “프러포즈 안 해?” “할 거야.”
결혼 3일 전에도 닦달했다. “프러포즈 해야지?” “한다니까!”
결혼 하루 전에도 닦달했다. “내일이 결혼식이야. 프러포즈 안 해?” “합니다.”
결혼식 당일 아침에도 닦달했다. “프러포즈 안 하냐?” “할 거예요.”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에서도 닦달했다. “프러포즈는?” “한다니까.”
그런데 김작가는 그의 친구들이 따라준 보드카에 그야말로 맛이 가서 피로연 중간에 종합 병원으로 실려갔고, 프러포즈를 애타게 원하던 난 예식을 했던 호텔 스위트룸에서 혼자 첫날밤을 외롭게 보냈다.
다음날 아침 든든하게 아침식사까지 하고 나타난 김작가가 누런 박스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프러포즈를 하겠다면서, 홍대 앞 ‘파피루스’에서 산 고가의 양가죽 노트와(금칠이 되어 번쩍번쩍하다.), 잉크펜(중세 유럽에서 귀족들이 썼을 것 같은 그런 펜이다.), 그리고 ‘K’이니셜이 새겨진 서양식 도장을 꺼내면서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사랑을 이 노트 안에 가득 담아, Kim의 약자인 ‘K’ 이니셜 도장을 찍어서 각종 기념일 아침마다 서재에 올려놓을 테니, 읽고 감동하라” 고 말했다. 그 순간 난 준비한 게 고작 이거냐? 하는 생각과 함께, 쇼핑 좋아하는 저 인간이 노트 세트가 맘에 들어서 일단 사놓고는 프러포즈랍시고 갖다 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됐다. 역시나! 결혼 생활 6년 내내 그는 한 번도 그 노트를 열어서 러브레터 따위를 써본 적이 없으며 심지어 그 노트가 지금 어디 쳐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고 자백했다.
정작가 솔직히 말하라. 그 노트 그냥 예뻐서 산 거 맞지?
김작가 예뻐서 산 거 73%, 프러포즈용 27%
정 내 이럴 줄 알았어!
김 글을 쓰는게 직업이라 그런지, 돈을 안주면 글이 영~써지질 않아.
정 아무리 돈 주는 사람이 없어도 결혼기념일이나 첫아이를 낳았을 때 정도는 노트에 장문의 러브레터를 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김 노트에 편지를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혼기념일을 그냥 넘긴 적은 없다. 매번 H호텔에 가서 뷔페로다가 고기, 회 등등을 먹여주지 않나? 첫아이를 낳았을 땐 산후 어혈을 푸는 데 좋다는 꽃게를 사다가 손가락 찔려가며 살 다 발라서 갖다주지 않았나? 이 정도면 이벤트 아닌가? 당신은 그 때 고맙다며 펑펑 울었다.
정 원래 산후에는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뻑 하면 운다.
김 아니, 왜? 왜? 왜? 여자들은 끊임없이 이벤트를 원하는가? 생각해봐라. 남녀가 결혼해서 대략 50년 정도를 같이 산다고 치자. 생일, 처음 만난 날, 결혼 기념일, 크리스마스 정도만 이벤트를 한다고 해도 1년에 4번이다. 여기에 50을 곱하면 2백 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서로 다른 이벤트 아이템을 2백 가지나 준비해야 된다는 건데, 이벤트 전문가도 아니고 2백 개를 생각해내기 정말 힘들다. 이 정도면 국정 교과서 기술 과목 중 세 단원을 할애해서 나라에서 가르쳐야 하는 수준이다.
정 탤런트 C모씨는 학교에서 <이벤트의 기술>을 배우셨나 보지?
김 C모씨라면 눈 땡구란 그 C모씨? 그는 모든 남자들의 원흉이다. 그의 아내가 아침 프로에 나오기만 하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남자들이 특정한 이유 없이 바가지를 긁힌다.
정 부러우니까들 그러지!
김 자랑하는 H양이 더 문제야. 섭외를 하면 안 돼.
정 자극을 받고 나도 해야겠다는 발전적인 마인드를 가져야지. 사랑을 표현하면서 재밌게 사는 사람들한테 원흉이네~문제네~이게 말이 되는가?
김 이벤트가 사랑을 재는 척도여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남편이 이벤트를 안 했다고 싸우고, 심지어 시댁까지 가서 뚱해 있었다는 A양의 사례를 최근에 듣지 않았는가? 이건 형식이 내용을 앞서는 격이다.
정 당신한테 이벤트가 형식일지 모르지만 여자들에겐 이벤트는 내용이다. 심지어 형식적인 거라고 해도 여자가 원하는데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김 해주고 싶어, 항상. 마음은 그래. 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왠지 쑥스럽고, 실패할까 봐 두렵고, 돈도 들고, 좋은 아이디어는 생각 안 나고, 맨 생각나는 게 차 트렁크에 풍선 채우기랑 아이스크림 안에 반지 넣어놓기뿐이다. 작가인 내가 이 정도면 보통 남자들은 머리에서 쥐난다는 야기다.
정 차 트렁크에 풍선, 아이스크림 속에 반지, 다 아는 거지만 난 상관없다. 일단 해봐라. 한번이라도 좀!
김 풍선 그게 입으로 불어서 뜨지도 않고, 헬륨가스를 넣어야 하는데 아무데서 파는 것도 아니고, 값까지 비싸다. 2,30개 불려면 몇 만원 깨지는데, 한 큐에 하늘로 날려버리느니 그 돈으로 H호텔 가서 뷔페 먹는 게 낫지 않은가?
정 그런 생각을 갖고 사니 내가 13년 동안 장미꽃 한 송이를 못 받아봤지.
김 (기막혀) 히야~그 동안 옷에, 가방에, 반지에 바리바리 사줬는데! 뭐 꽃 한 송이 천 원짜리 그걸 안 사줬다고 이 타박이야? 사줄게 사줄게 당장 사줄게. 빨간색으로 한 송이면 돼?
정 한 송이는 무슨! 최하 백 송이다. 몰라도 너무 몰라. 이벤트는 백 단위가 기본이야!
김 백송이면 돈이 얼만데. 그 돈이면 <H 호텔>뷔페를 가지.
정 뷔페 타령 좀 그만해라!
김 나 어릴 땐 뷔페가 최고 였어! 위성도시 아이들의 로망!
정 오늘 주제가 이벤트인지 뷔페인지 독자들이 헛갈리겠다. 남자들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한다. 뭐 군대는 좋아서 가나? 의무다. 이벤트는 남자의 의무사항이다.
김 그게 왜 남자만의 의무인가? 여자들도 한번 해봐라. 남자도 사랑 확인받고 싶고 아이스크림 속에서 차 키 나오고 그런 거 원한다.
정 여자들 중에도 이벤트 하는 사람 있다.
김 있기는!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있다면 그건 한강에서 괴물이 발견될 정도로 진귀한 사건이다.
정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 직접 만들어서 갖다주는 그런 여자들 있다.
김 발렌타인 초콜릿? 이것 봐라. 이벤트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 아니다. 미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칸 뷰티적 사고에서 출발한 허례 허식이며,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가 남긴 폐해다. 그래서 난 가정 의례 준칙에 ‘원만한 부부 관계 유지와 불필요한 가계 지출 방지를 위하여 이벤트를 금한다’ 는 내용을 첨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 참 말도 많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면 그냥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김 그렇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 번 시작하면 적어도 50년간 2백 번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한번 하고 안 하면 작년엔 하고 올해는 왜 안 해주냐며, 사랑이 식었네~ 내가 늙었네~ 가슴이 처져서 그러네~ 괜한 시비를 걸어올 게 뻔하다. 2백 번 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시작을 않는 게 현명하다.
정 참 현명하십니다.
김 자고로 세기의 현인들인 부처, 예수, 공자님이 연인에게 이벤트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정 알겠습니다. 그냥 더럽고 치사해서 포기하겠습니다.
김 뭘 또 그렇게 불쌍하게 말하는가? 그럼 하나만 묻자. 당신은 아이스크림 속에서 나온 거북이가 네 발을 벌리고 있는 누런 순금 반지를 받는 게 좋은가? 아니면 이벤트는 없지만 전 세계적으로 품절 상태인 스와로브스키의 핑크색 커다란 크리스털 반지를 받는 게 좋은가?
정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김 이벤트만 화려하면 뭘 하나? 많은 여자들이 남자가 선물한 물건이 마음이 안 들어서 바꾸는 일이 허다하지 않는가. 하지만 난 늘 당신에게 성공적인 선물을 안긴다.
정 그건 그렇다. 당신 선물은 친구들도 모두 인정한다.
김 난 어떤 이벤트를 할지 고민하진 않지만 어떤 선물을 할지는 늘 고민한다. 여성 잡지를 매달 세 권씩 구독하면서 요즘 트렌드가 뭔지를 파악하고, 당신에게 부족한 아이템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생각해봐라. 난 당신과 잡지를 같이 보다 이거 예뻐? 이거 좋아?? 하고 붇지 않는가? 그리고 당신이 예쁘다고 말한 걸 난 모두 기억해둔다. 이게 헬륨가스 가득 찬 풍선보다 못한 것인가? 대답해봐라! 못하다고 그러면 내년부터 매년 생일날 아이스크림 속에 누런 순금 반지 십이지신상 시리즈로다가 넣어줄 테니까!
정 아이스크림 속에 그냥 스와로브스키 넣어주면 안되나?
김 끝까지 아이스크림에 연연하시겠다? 좋아! 올 크리스마스 때는 가방을 사주려고 했는데, 아이스크림으로 범벅된 가방으로 줘야겠군
정 이런 극단적인 캐릭터를 봤나! 그래, 범벅해서 줘. 상관없어. 나도 이벤트라는 것 좀 받아보자.
김 알았어. 당신이 예쁘다고 했던 발렌시아가 그 파란색 가방을……
정 꺄악~ 발렌시아가~ 너무 갖고 싶었어! 안 돼 안 돼~ 그냥 줘. 아이스크림 묻히면 죽는다.
김 그러니까 이벤트는 안 해도 되는 거지? 나는 가서 잡지나 봐야겠다. 뭐 또 우리 마누라한테 어울릴만한 예쁜 아이템이 없을까나?
정 아뿔싸! 실수다! 순간 물욕에 눈이 어두워 이벤트를 포기하다니. 아~ 죽기 전에 한번쯤은 나도 이벤트를 받아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 얄미운 인간이 이벤트를 해줄까? 내가 먼저 해주면 미안해서라도 한번은 하지 않을까? 그래! 내가 먼저 해주고, 받았으니 당신도 하라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거야! 이번 크리스마스에 어떤 이벤트를 해볼까?풍선?아이스크림? 아니, 그런 거 말고! 풍선…아이스크림…풍선…아이스크림…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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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wud2007-10-29 07:02
글 쓰시는 분들 답게 마지막 수사는 꽤나 문학적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악!!2007-10-29 07:42
이벤트는 평생 두번 결혼식과 회갑잔치 라고 말씀하시던 형님이 문득 떠오르는 군요..
연지2007-10-29 11:57
하하. 평생에 두번밖에 안되면 너무 슬퍼용
onion2007-10-30 11:57
개인적으론 '성의' 라고 생각해요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하는거가
쑥쓰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벤트란 단어에 관해 좀 딴소리인데요,
예전에 여자친구에게 해줬던 일들이나, 하던 일들(진행하다 실패한-_-;)을 보고
친구들이 특기가 이벤트네 어쩌네~ 라고 했을때 참 기분이 별로였어요
그저 특별한 날,영영 돌아오지않을 날 소중한 추억하나 만들어보자며 열심히
생각하고 준비해서 즐거웠던 일들인데.. 엄청 준비하고, 고생했던일들이 겨우
'이벤트' 한단어로 끝나고 마는게 지금도 기분 별로인거 있잖아요? 음 뭐
이를테면 내가 고작 "이벤트 잘한다" 이소리 듣자고 한 일인가 하는 그런거?
여튼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좀 그랬어요, 물론 여자칭구는 너무 기뻐해줘서
고마웠고요, 근데 이벤트란 말 말고 좀더 근사한 어울리는 단어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진짜 몇년 걸린 노력도 주위에서 표현해버리길
'이벤트 좋았다~!' 요걸로 끝이면 그건 좀..;
쑥쓰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벤트란 단어에 관해 좀 딴소리인데요,
예전에 여자친구에게 해줬던 일들이나, 하던 일들(진행하다 실패한-_-;)을 보고
친구들이 특기가 이벤트네 어쩌네~ 라고 했을때 참 기분이 별로였어요
그저 특별한 날,영영 돌아오지않을 날 소중한 추억하나 만들어보자며 열심히
생각하고 준비해서 즐거웠던 일들인데.. 엄청 준비하고, 고생했던일들이 겨우
'이벤트' 한단어로 끝나고 마는게 지금도 기분 별로인거 있잖아요? 음 뭐
이를테면 내가 고작 "이벤트 잘한다" 이소리 듣자고 한 일인가 하는 그런거?
여튼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좀 그랬어요, 물론 여자칭구는 너무 기뻐해줘서
고마웠고요, 근데 이벤트란 말 말고 좀더 근사한 어울리는 단어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진짜 몇년 걸린 노력도 주위에서 표현해버리길
'이벤트 좋았다~!' 요걸로 끝이면 그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