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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드라이브

캐서린2008-07-26 20:10조회 506추천 25


기사아저씨가 자꾸 졸았다

두 손에 쥔 핸들 쪽으로 자꾸 고개를 떨구면서 운전했다
나는 불안해도 말은 못하고 곁눈으로 흘깃거리기만 했다
'아저씨 전 아직 25살 밖에 안됐어요 죽기 싫어요'
라고 속으로는 애원하고 있었다

곡예하듯 도착한 신촌역은 예상대로 붐볐다

네온 사인이 즐비하게 춤을 추고
거리 전체가 휘청거리는 그곳을 나는 달리다시피 걸었다
이대방향은 멀고 높아서 처음부터 숨이 가파랐다
잠시 휴식하는 듯 조용히 숨쉬는 잿빛의 보도가 내 숨을 어루만졌다

사뿐히 내리는 비를 피해 닿은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는 나를 흐리멍텅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주욱 당겨져서 가까웠다

손을 붙들다시피 해서 끌고 내려갔다
상대는 비틀거리면서 횡설수설하고 이따금씩 침을 뱉었다
술기운이 내뿜는 말들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입다물고 있었다

새벽을 알리는 밤의 공기와
가로등의 오렌지빛은 서로 맞물려 은은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게 오늘, 이 밤을 배반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말했다

"대림동이면 신길쪽인가요?
아니, 영등포쪽으로 돌아서 가야되나?"

나는 그냥 아무렇게나 가주세요, 라고 말하고선
창틈으로 턱을 괴고 다리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졸음운전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사람이 그리워졌다

다리 너머로 보이는 국회의사당과
기다란 빌딩들이 나를 감싸면서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나를 멀리서부터 저버리는 것 같이 뒤로 내뺐다

기사아저씨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요새 기름값 올랐는데 택시 기본료는 어때요?"

"재작년인가부터 1600원에서
1900원으로 뛰었는데,
그것도 간당간당해요,
이것도 비싸다고 하는데 더 오르면 큰일납니다
원래도 손님이 없는데, 요즘은 더 하죠
미치겠어요 아주 그냥"

"어휴 힘드시겠어요"

"손님만 태워드리고서 오늘은 이만 접으려고요"

택시는 더디게 흘러갔다

내가 내리는 삼거리는 고개없이 평평했다
만원을 내고 거스름돈을 건네받으면서
나는 그에게 뭔가 따뜻한 한마디를 내어줘야겠다 생각했다

"아저씨,"

"예 손님"

"무사고 운전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택시를 떠나보내고서도 나는 멍하니 섰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전송하는 기분으로
멀찍이 떨어지는 택시를 끊임없이 쳐다보았다

오늘밤은 나로부터 모든 것이 멀어졌다

신촌도, 빌딩도, 국회의사당도, 택시도, 만원도, 버스정류장도,
이대방향의 보도도, 영등포도, 심지어 기사아저씨도

너무 가까워서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모든것이 나를 떠났다

그래서 우리 앞으로 보지 말자, 장난같은 그 말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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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Sartre2008-07-27 03:00
글 내용이란 상관없지만 정말 신기해서 댓글 남깁니다.
전 어젯밤에 이대에서 신촌으로, 신촌에서 영등포를 거쳐, 대림 옆에있는 남구로에 갔었거든요. 어쩌면 길거리에서 서로 지나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Radiohead2008-07-27 06:37
글 내용이랑 상관있지만 캐서린님 글 재밌어요
Starlight2008-07-27 11:03
글 내용이랑 상관없지만 글 분위기가 멋있어요 살면서 드는 생각과 비슷한 부분도 있구요 히히;
담요2008-07-28 07:42
저 좀 팬임.
mean2008-08-03 04:30
저도 팬이에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