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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캐서린2008-09-21 18:22조회 663추천 43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 곳은 3년 전의 학교 운동장 한복판이었다
막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12월 겨울,
잿빛으로 물드는 저녁하늘이 하얗게 바래가는 시간

나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리가 아프다

머리에 붕대가 감겨져 있는데다가
손에는 총알 1발이 장전된 리볼버가
들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나는 다시금 잠에 빠졌다

나는 긴 꿈을 꾸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갓난아이 발이 알맞게 푹 담길만큼의
눈쌓인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나는 사랑을 몰랐다

그저 지금 우리가 누워있는 운동장 한복판이
또다른 은하계 저편에 있을 행성처럼 새롭고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이마와 뺨에 키스했다
따스한 입김이 하늘 위로 불타올랐다

난 꿈에서 깼다
채널을 돌리고서 흥미를 잃고 꺼버리는 TV처럼
나는 꿈에서 깼다

그러고 나서 리볼버의 장전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복수하고 싶었다
내 머리는 그녀때문에 피가 흘렀다,

눈발이 세지고 커져서 시야가 흐렸다
편성시간대가 끝난 TV화면의 샌드스톰같았다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그녀와 내가 누웠던 운동장의 어느 지점을

걷다가 달렸다

저 멀리서 눈쌓인 봉분 두개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리볼버 쥔 손을 가슴팍까지 올렸다

긴장하지마
네가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 왔잖아
기억에서 지워버려

전혀 아름답지 않은 기억,
추하고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한 기억
아껴두고 간직해둬봤자 쓸모없을 쓰레기 같은 기억

어디선가 그녀가 부르던 롹음악이 들린다
그것은 학교의 스피커에서 울려퍼지고 있다

그래,

나는 리볼버를 그녀에게 겨눈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된 채 3년전의 나를 마주하고 있다
리볼버의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투명인간이라도 된것일까

얼른쏴
얼른쏴
얼른슛

스퍼커에선 이런 가사의 노래가 들려온다
노래의 비트에 맞게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총구가 그녀의 머리에서 비껴가기 시작한다
TV를 다시 켜고 어떻게든 볼만한 채널을 찾기 시작한 것처럼,
나의 손은 저절로 그녀가 아닌 어느곳을 향하고 있다

타겟은 그녀 옆에 누워있는 3년 전의 나

행복하게 웃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기억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포장해서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바로 나다

얼른쏴
빨리빨리빨리

펑 하고,

그날, 나는 나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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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철천야차2008-09-24 07:30
1발 1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