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글 보기

누워계신 할머니

애기고기2006-08-10 19:01조회 605추천 11
즐거운 새벽 데이트를 마치고, 집앞 놀이터에서 여유롭게 담배 한 대 피고 집으로 가는데 문앞에 왠 할머니가 잠옷차림으로 누워계셨다. 나랑 순간 눈이 마주친 순간 할머니는 뭔가 이상한 눈빛으로 날 보았고 내 머리속에서는 '무슨일이지?' 에서 '더워서 밖에서 주무시나' 로 바뀌었다.
그 후 '뭐 괜찮으시겠지'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에 할머니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문을 열어 놓아 달라고 하셨다.
"근데 이거 자동문이라서 열면 저절로 닫혀요, 왜 그러세요?"
"내가 지금 어디서 떨어져서..."
다시한번 할머니를 보니 잠옷에 흙이 군데군데 묻어있었고, 무릎도 상처가 나있는데다가 맨발이었다. 몸을 낮추고 얼굴을 보니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계셨다.
"네? 아니 어쩌다가 떨어지셨어요. 집이 여기세요? 몇호에요?"
"아니..1203호.. 나 좀 일으켜 줄래요?..."
나를 향해 올리 손을 잡고 살짝 당기는 순간에 할머니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보기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가족들 전화번호 아세요?"
"으응...011..9132..xxxx"
'나랑 번호가 비슷하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걸자 한참후에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았고 나는 할머니에게 바꿔드렸다.
"xx니?..응..지금 너네집 앞인데.. 어디서 떨어져서...어디긴 108동 늬집 앞이지.. 좀 내려와줄려?.."
핸드폰 수화음을 내가 최대로 올려놓아서인지 옆에 있어도 상대방 남자의 말이 내게도 잘 들렸는데, 이상하게도 그 남자 말투가 너무 냉담했다.
남자가 내려오는 사이에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여기에 사시는게 아니고, 여기는 딸의 집이며, 방금 전화받은 남자는 손자인듯 싶었다. 그 와중에도 손자가 현재 중국에 유학중이며 방학이어서 잠깐 집에 와서 묵고있다는 손주자랑을 나에게 들려주셨다.
아니.. 내가 궁금한건 그런게 아니잖아요.
"어쩌다.. 어디서 떨어지셨어요?"
"그게..아..나도 몰러....난 저어기 원룸에서 사는디.. 떨어져서 택시 타고 여기서 내려달라고 해서.. 기사양반이 돈 안받고 그냥 갔어.."
"(혼자사시는군...) 근데 여기 언제부터 누워계셨어요?"
"한참됐지..지나가는 사람이 없길래... 아니 학생은 여기 살어?"
"아, 네. 여기 11층이요.."
라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 하나가 무뚝뚝한 얼굴로 나와, 무슨일이냐고 물어봤다. 참 빨리도 오네.10분은 족히 넘었을꺼다. 남자가 나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
"여기 와보니깐 할머니가 쓰러져계시더라구요."
남자는 쓰러져있는 할머니를 위에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몇마디 나누다가 잠깐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겠다고 한후 가버렸다.
할머니는 물론 나도 당황한 채 있다가, 다시 얘기를 나누었다.
"침맞으면 금방 날텐디.. 지금은 다 닫았겠지?.."
"그렇겠죠"
"내일 한림대학병원에 가봐야하나...근데 이래갔고서야 원, 걷지도 못하겠으니.."
남자가 엄마로 보이는, 할머니의 따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아니, 엄마. 어디서 떨어진거야 어쩌다가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
"몰러..떨어져서...택시잡아서 왔는데..기사양반이 돈도 안받고 그냥 가더라고...그래서 여기 누워있는데 이 학생이 지나가다가....."
할머니의 따님은 화가 난 듯했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유학파 손주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어색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뻘쭘하게 서있었다.
"고마워요.. 이제 들어가세요. 저희가 알아서 잘 할께요"
아주머니가 친절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유학파도 친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순간 나는 그 가식적인 표정에 충격을 받고, 여기로 이사온 직후부터 생겼던, 이 아파트와 여기 사는 사람들에 대한 짜증이 몇배로 커져서, 더이상 할머니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게되었다. 빨리 이 자리를 떠나서 내방으로 들어가고픈 생각만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아니 뭘요..."
나도 곧바로 친절하면서도 많이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발걸음을 떼기 직전까지 잠깐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내가 뭔가 한마디 더 남기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그 아주머니와 유학파에게 뭐라고 말을 더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않아서 그냥 할머니에게 '조심하세요' 라는 어정쩡한 멘트를 날리고 집에들어왔다.
이 글의 주인이신가요?

댓글 4

SENG2006-08-10 23:52
쓴 글 중에 제일 긴것같네
알수 없는 사정이 있겠지..
wud2006-08-11 00:59
사랑해 지선아의 주인공도 평촌 사는데.. 인간극장의 한 장면보다 더 안타까워요.
유토2006-08-11 15:58
세상이 미쳐가네
차차2006-08-12 13:03
궁금하다... ..